철학

삶이란 자전거와 같다.

검은야망 2023. 3. 28. 22:46

삶이란 자전거와 같다. 계속 페달을 돌리지 않으면 어느새 휘청거리며 넘어진다. (이 말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다.)이 과제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렇기에 모두가 페달을 돌리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종종 어떤 이들은 페달을 돌리다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곤 다시 못일어나곤 한다. 그런 이들의 시간은 타인들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주변 풍경과 타인들은 계속 페달을 돌리며 나아가는데 자신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우린 세상을 상대속도로 인식한다.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한다. 그런데 내가 멈추는 순간 그 상대속도는 대략 2배가 되어 더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들과의 거리도 몇배 빠르게 멀어진다.

우리가 불쾌히 여기는 길바닥에 남겨져 무료 급식소에서 밥을 얻어먹는 노숙인들과 걸인들도, 한 때는 찬란하게 페달을 돌리던 시절과 욕망이 있던 사람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남들보다 몇배 더 많은 장애물이 있었을 지 모르고, 넘어지고 일어났음에도 또 큰 장애물이 덮치고 너무 지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들에게 삶이란 시련이고 허무한,그리 아름답지 못한 대상일 것이다. 그들에겐 아마도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할 때 손을 내밀어줄 이가 없었을 것이고, 그러한 이 하나 없는 세상은 지옥같이 느껴질 것이다.

우린 때론 이러한 자들의 삶이 우리와 먼 것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모두는 안개 낀 도로 위를 자전거로 질주하는 존재일 뿐이다. 우린 저 너머의 것을 알 수 없으며 무슨 시련이 닥쳐올지 전혀 예측할 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저 불행해 보이는 삶에 언제든지 다가갈 수 있다. 이는 인간의 한계이다. 그들도 이러한 미래를 절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람이 스쳐가듯 지나간 세월들은 티끌처럼 쌓여 태산이 되었고 어느덧 바라본 자신의 모습은 최악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어느정도의 동정을 베풀 필요는 있다.(여기서는 정서적 지원을 말하고 있다. 단순한 금전적 지원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삶'이란 것은 정말 우연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운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삶은 그렇다. 우리의 선택 하나 하나는 사실 정밀한 운의 요소로 나타난 것들이다. 우린 우리 스스로가 무언가를 이뤘다고 생각하지만, 그 배경이 없었다면 대부분 그것은 이뤄지지 못한다. 그 배경은 유전, 좋은 부모, 뛰어난 조력자 등이 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워즈니악을 만나지 못했다면, 스티브 잡스는 단순히 방황하다가 삶을 어영부영 보낸 괴팍한 이로 삶을 마감했을지 모른다. 스티브 잡스는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천재지만, 그 통찰력이 쓰이는 곳에 그가 있지 않았다면 그는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삶이 이토록 비연속적이고 괴팍하고 폭력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만, 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희망을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삶은 복잡하고 우연적 요소로 가득 차있지만, 이에 대한 우리의 해결책은 단순하기 때문이다.

"삶이 위기를 주면, 털고 일어난다. 그리고 다시 페달을 돌린다."

우리의 이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단 이것뿐이다. 우린 절대로 안개 너머의 세상을 감히 예측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측하지 못한다면 대비하는 것이 최선이다. 마치 미래의 사고를 위해 보험을 들어놓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보험을 들 필요가 있다. 거창한 보험이 아닌 위기를 받아들일 태도가 그 자체가 보험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신나게 페달을 돌리다가 닥쳐온 장애물에 픽 하고 넘어져 다시는 못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위기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된다. 격투기 선수를 예로 들면 격투기 선수중 초반 커리어를 대부분을 초살 ko로 이긴 선수들이 있다. 이러한 선수들은 초신성으로 떠오르며 엄청난 자신감을 보여준다. 그러나 상승세가 꺾이는 순간 크게 약점이 노출되며 좋은 커리어를 이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위기 경험이 부족해서 위기 상태가 왔을 때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신감도 많이 꺾일 것이다. 그러나 초반 커리어에서는 위태위태 하다가 중후반 커리어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들도 있다. 그들은 크고 작은 위기 경험을 많이 겪어봤기 때문에 그들은 위기가 오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언제나 그 위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이 두 극단적 예시를 비교해보면 위기에 대비하는 것과, 그 대비가 실제로 위기 상황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다 아는 것처럼 오만하게 글을 쓰고 있지만, 내 삶도 현재 위기 그 자체이다. 이 위기에서 나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끼고 있으며 실제로 아직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삶의 심판은 계속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고 나는 링 위의 ko직전 복서이다. 심판이 카운트다운을 끝낼 때 삶과의 싸움은 패배로 끝날 것이다. 나는 그 전에 일어나야만 한다. 링 위의 나는 일어나려고 애쓰지만 숨을 헐떡일 뿐이고 팔다리는 엉거주춤 움직이기만 한다. 실제로 내 상태는 저번주에는 실신을 할 뻔 했고, 깊은 우울감과 무기력에 휩싸여 그 무엇도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나는 점점 침전되고 있으며, 나의 자전거가 거리의 노숙자들의 삶에 가까워지는 것 같은 느낌도 종종 받는다. 이 침전은 나로 하여금 각종 정신질환자의 느낌과 여러 소수자들의 삶을 이해하도록 했다. 그만큼 그들과 나는 동질되어 가고 있으며, 때론 범죄자의 삶에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아마 심화되면 내가 그들이 되어갈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삶을 벗어나고야 말 것이다. 이 굳은 의지를 지키고야 말것이다. 삶의 폭력에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핸들을 잡고 페달을 돌려 삶의 폭력에 대비하지 못한 이들이 넘어질 때 앞서나갈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가 그리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누군가는 나의 글을 읽으며 이 불쾌한 깨달음에 몸서리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썩 유쾌한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은 이가 핸들을 놓쳐 페달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크게 도움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그렇지 않은 이라도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정도는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어린 나이지만 종종 깨달음을 적어 글을 적는 것이기도 하다. (종종 블로그에 들어와 글을 읽어주는 이들에게 정말로 감사합니다.  가끔씩 댓글도 달아서 같이 얘기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슬기롭게 삶을 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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