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행복론

검은야망 2023. 4. 11. 00:16

<서론>
나는 이 글에서 행복의 정의를 세우고, 그 정의를 바탕으로 사회의 도덕적 패러독스를 해결해나가려고 한다. 나의 철학적 생각은 개인적인 경험과 여러 철학자들의 사유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쓰인 글임을 미리 말한다. 그러나 이 글의 대부분은 순수한 나의 철학적 사유에서 나왔고, 단순히 철학자들의 생각을 짜깁기 한 글은 아니다.(나는 여러 철학자들의 생각을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한다. 따라서 여러 철학자들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겹치는 부분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글에선 나의 철학적 사유와 그 논리 전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나의 떠오르는 아이디어와 생각을  그때그때 정리해 놓은 것에 불과하기에 이 글의 완성도는 다소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이 글의 핵심 내용은 남겨두고, 다시 정리해서 써서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을 할 수도 있다.) 이 글은 나의 사유의 흐름 위에서 철렁이는 하나의 돛단배라고 생각하면 좋다. 그 돛단배는 평화로운 바다 위에서 평안함을 유지할 수도 있지만, 폭풍우에 떠내려갈 수도 있다. 따라서 이 글을 읽을 때는 "이 주장이 설명력이 있는 주장인가?"라는 의문을 던져가며 비판적으로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며, 그 사유의 흐름에 집중하면서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글을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행가들에게 바친다. 또한 이 글이 그 여행의 의미 있는 나침반이 되기를 소망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감성과 이성 그리고 믿음>
행복이란 무엇인가? 여러 철학자들이 이 질문에 물음을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행복을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지 않은 상태'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쾌락과 행복의 차이에 분명한 선을 그어줄 수 있다. 우린 종종 쾌락을 행복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쾌락과 행복은 같은 것이 아니다. 쾌락은 '어떤 감정이 있는 것'이지만 행복은 '어떤 감정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논의에서는 이 쾌락과 행복은 질적인 범주에서 나눠지므로, 그 개념의 차이를 확실히 할 수 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한 예시를 제시해 주겠다.

한 가지 예시로, 우리는 쾌락을 누리면서도 불행해한다. 만약 쾌락이 행복이라고 가정한다면(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하면), 이 말은 모순을 담고 있을 것이다. 행복과 불행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에 대해서 얘기해 보겠다. 누군가가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혼자서 포르노 영상을 본다고 하자. 그 사람이 행복하게 포르노 영상을 볼까? 앞선 것처럼 쾌락=행복으로 정의한다면, 이 예시에 대해서 '행복하다'라고 답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불행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가능성'으로 표현한 것에도 이유가 있다. 뒤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행복을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지 않은 상태'라고 정의해 보자. 그는 쾌락을 느끼지만,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황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느낄 수도 있으므로 불행할 수도 있다. (물론 사회적 고립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쾌락과 부정적 감정에 휩싸인 상태는 양립할 수 있다. (모순이 아니다.) 그렇기에 쾌락을 느끼면서 부정적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정의는 쾌락이 행복으로 가정한 설명보다 훨씬 설명력이 높은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앞선 예시를 바탕으로 쾌락과 나의 행복의 정의가 확실히 구별된다는 것을 인식했을 것이다. 쾌락과 행복은 다른 범주라는 것을 염두하길 바란다.

일단 이 정의를 바탕으로 해도, 약간의 문제가 남아있다. 과연 부정적 감정이란 무엇인가?이다. 나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의 성질을 이성과 감성 둘로 나눴다. 이제 나는 이성과 감성에 대해서 설명할 것이다. 일단 먼저 감성부터 설명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감성이란, 인간의 동물적 본능과 감정을 담당하는 성질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또한 감성은 촉발적이며 충동적이므로 그 즉시 발현된다. 우리는 감성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며, 여러 가지 욕구도 느낀다. 우리가 거지를 보고 동정심을 느끼는 것은 감성의 영역일 것이며, 우리가 성욕이나 식욕을 느끼는 것도 감성의 영역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감성을 믿음에 근거하는 감성과(믿음적 감성이라고 표현하겠다.), 욕구적 감성 둘로 나눴다. 믿음적 감성은 개인의 믿음에 근거하여 나타나는 감정이고, 욕구적 감성은 인간이 느끼는 욕구 그 자체를 의미한다. 나의 정의에서 행복이란 믿음적 감성에 근거하며, 욕구적 감성에 근거하지 않는다.
여기서 믿음적 감성에 대한 부차적인 설명을 하며 논의를 이어가 보겠다.

믿음적 감성은 믿음에 근거하는 감성을 말한다. 우린 인생에서 여러 가지 믿음을 갖는다. 넓게 생각하면 신에 대한 믿음이 있을 수 있고, 좁게 생각하면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지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이란 것은 주관적 생각이다. (우린 때론 믿음이 강해서 그 생각이 '주관적'임을 잊고 '객관적'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또한 믿음은 양적인 범주이다. 그 말뜻은 믿음에도 양적인 정도가 있다는 뜻이다. 믿음을 0%부터 100%까지 있다고 하면, 우리의 믿음은 50% 일수도 있고, 80%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후세계가 있다는 말을 조금 믿을 수도 있고, 불신할 수도 있고, 맹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믿음은, O, X로 표시하기 어렵다. 그런데 믿음과 감성이 무슨 연관을 지닌다는 것일까?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어떤 한 학생이 있는데, 타인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며, 그 믿음의 정도는 꽤 높다. 다른 이들이 그 믿음이 아니라고 해도 쉽게 바뀌지 않을 정도로 그 믿음이 강하다. 그 학생은 그 믿음으로 인해 부정적 감정을 얻을 것이다. 그 부정적 감정으로 인해 그 학생은 아마도 스스로를 행복하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 예시를 통해 '믿음'과 '감성'의 인과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설득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인과관계에 근거하면 스스로의 주관적 믿음이 결국 감정을 일으키고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논의는 꽤 많은 사례를 설명할 수 있다. 스스로를 불행히 여기던 자가 기독교를 믿고 행복해졌다는 사례도 얘기할 수 있다. 왜 불행했던 자가 기독교를 믿고 행복해진 것일까? 진짜 주님의 축복이라도 받은 것일까? 아마도 불행히 여기던 자는 부정적 감정을 촉발시키는 부정적 믿음을 지녔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를 꽤 큰 믿음으로 믿는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가치와 율법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새로운 믿음을 얻었고 그 새로운 믿음이 부정적 믿음을 사라지게 했을 것이다.
부정적 믿음이 사라진다면 부정적 감정의 원인도 사라지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예시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믿음의 범주를 우리의 통념으로 제한한 예시다. 그러나 사실 그 믿음의 범주는 생각보다 거대하다. 나는 범주를 넓혀 사회 전체가 믿음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사회의 구성원들은 흔히 상식으로 생각하는 여러 믿음을 지니고, 그 믿음이 사회를 굴러가게 한다. 일단 조금 큰 예시를 들면 화폐가 있을 수 있다.(경제 자체도 믿음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해 전문가가 아니므로 말을 아끼겠다.) 화폐는 사실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 그 화폐로 물건을 교환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그 화폐가 가치를 갖게 된다. 만약 많은 이들이 화폐에 대해 의심을 갖는 순간, 아마도 그 화폐는 다시 종이쪼가리로 돌아갈 것이다.
또 다른 예시를 들어보면 과학에 대한 믿음이 있을 수 있다. 우린 과학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과학에 대한 생각도 결국 믿음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이 태어나기 이전에는 뉴턴의 법칙이 전부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대다수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믿고 있다. 만약 과학이 객관적 사실이었다면 절대적인 것일 텐데, 왜 변화하는가? 결국 과학도 설명력이 높은 이론을 받아들이고 스스로가 믿는 것뿐이다. 과학도 믿음이기에 과학 이론이 계속 엎치락뒤치락하며 발전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더 작은 예시로 들어가면 여러 믿음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별 의심 없이 학교에 다녀한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가? 우린 사회에서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의 크기는 개개인마다 다를 수는 있으나 선진국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크고 작은 곳에서 우리가 당연시 여겼던 믿음을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예시를 더 대고 싶지만, 이 예시를 스스로 찾아보는 것은 독자에게 맡긴다. (아마 데카르트처럼 모든 것을 의심의 눈을 갖고 본다면, 세상 대부분이 믿음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왜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갖게 되는가? 우리의 믿음은 '이성'이 결정한다. 여기서 이성이란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보는 무언가가 아니고, 어떤 믿음의 정도를 결정하는 무언가일 뿐이다. 우리의 이성은 여러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믿음을 결정한다. 이성은 단순히 주변 사람들을 보고 따라 해서 믿음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어떤 이론을 보며 이론의 설명력에 감탄하며 믿음을 가질 수도 있다. 이성은 어떤 현상이나 내용을 보고 적합성을 도출할 수 있으며, 적합해 보이지 않는 설명에 의심을 품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적합성의 도출도 결국은 주관적인 것이다. 사람마다 도출한 적합성이 다를 수 있고, 그에 따라 다른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만약 이성이 객관적이라면 왜 우리는 이념적으로 대립하는가? 우리 모두에게는 이성이 있는데 말이다. 그러한 이유는 이성적 사유도 결국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이성이 내린 결론은 비슷할 수는 있으나 다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결론들 사이에서 설명력이 높은 이론을 이성적 사유로 판단하여 받아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성은 왜 주관적인가? 이성이 주관적인 이유는 이성도 믿음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는 역설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다. 예를 들면 신학의 발전을 설명할 수 있다. 신학은 신에 대한 믿음에 근거로 해서 발전한 학문이다. 신학적 성과 대부분이 신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시작된 이성의 사유, 이성이 만들어낸 설명력 높은 새로운 믿음이 누적되면서 만들어졌다. 이처럼 이성도 믿음에 근거해서 새로운 믿음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믿음과 이성이 연쇄적인 관계라면 분명히 그 사슬의 시발점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발점은 무엇일까? 그 시발점은 욕구적 감성에 있다. 욕구적 감성은 인간, 모든 동물이 선험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적 감성은 모든 감성과 이성에 선행된다고 볼 수 있다. 진화론적으로 접근하면, 어떤 욕구적 감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향으로 이성이 진화해 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은 행복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에 더 얘기하지는 않겠다. 이 욕구적 감성이 시발점이 되어 새로운 믿음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경험과도 관련이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만약 당신이 사과를 먹다가 사과 씨가 목에 걸린 경험이 있다고 해보자. 아마 당신은 다음번에 사과를 먹을 때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사과 먹을 때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이성과 감성으로 표현해 보겠다. 먼저 당신은 욕구적 이성중 하나인 생존욕구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과 씨가 목에 걸린 순간 당신의 이성은 생존 욕구(생물은 살아야만 한다는 믿음)라는 어떤 강력한 믿음을 바탕으로 콜록대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다음 어찌어찌 사과 씨를 목에서 빼낸 후 당신의 이성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믿음인 "사과를 먹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를 얻었을 것이다.
되게 단순한 예시지만 이해를 돕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모든 생각은 결국 이 '욕구적 감성'에 시발점을 두고 있을 것이고 연쇄적인 관계를 통해서 깊은 사고로 나아갔을 것이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는 최초에도 욕구적 감성을 충족시키는 잘 충족시키는 다양한 이성이 있었을 것이고, 점점 그 가지를 뻗어나갔을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깊게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의문이 들더라도 양해 부탁한다. )

이렇게 이성과 감성에 대해서도 논의해 봤다. 앞선 내용을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욕구적 감성은 선험적으로 존재했고 이성은 그 욕구적 감성을 근거로 믿음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 믿음은 다시 이성적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 믿음에 근거한 감성인 믿음적 감성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여금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언어와 감성>
앞선 긴 논의에서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말하고, 믿음을 바탕으로 한 이성과 감성을 정의했다. 나는 다시 행복이란 목표를 향해 다시 또 논의를 해보려고 한다. 이 논의를 하기 전 믿음의 주관성에 대해서 중요시 여겼으면 좋겠다. 모든 감정의 문제는 결국 주관성을 바탕으로 나타난다는 것. 이 논점이 상당히 중요하다. 어쨌든 나는 이 논의에서 감정과 행동의 인과성에 대해서 따져보려고 한다. 일단 하나의 예시를 들고 시작해 보겠다. 어떤 한 인물이 친구의 얘기를 듣고 기분이 나빴다고 가정해 보겠다. 이 인물은 왜 기분이 나빴을까? 왜 부정적 감정을 느꼈을까? 친구의 얘기 때문일까? 나는 이 지극히 평범한 예시를 분석해보려고 한다. 친구의 얘기는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언어는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이미지나 느낌을 표상시킬 수 있다. 언어도 믿음에 근거한다. 어떠한 말의 뜻을 다수가 당연하게 믿음으로써 그 의미가 확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표상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 표상은 대부분 비슷하게 그려지긴 하겠지만, 그 디테일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 디테일의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언어의 디지털성과 대립되는 자연의 아날로그성이다.
언어의 디지털성은 개념화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어떤 복잡한 자연의 아날로그적인 것을 이해할 때 개념화해서 이해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비슷한 것을 묶어서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나무들도 그 각자의 생김새와 디테일은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그 나무들이 '나무'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아마도 언어가 없었던 시절부터 개념화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이 된다.(언어가 없는 새도 벌레와 나무를 구별한다.) 그런데 언어가 그 개념화 능력을 극대화했고 그 표상을 고착화시키기 시작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세세하게 범주화해서 언어로 묶어낼 수 있었지만, 그 디테일은 반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서 언어의 디지털성과 실제 자연의 차이로 인해 디테일의 차이가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디테일의 차이는 개개인의 믿음의 반영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어느 경우에는 문화적인 맥락의 어떤 믿음(속어 사용, 관용 표현 사용)에 따라서 그 표상하는 뜻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언어의 표상은 주관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 주관성을 이해하면 앞선 예시를 더욱 분석해 나갈 수 있다. 친구의 얘기를 듣고 기분이 나쁜 이유가 뭐였을까? 아마도 그 언어의 해석이 믿음에 근거해서 달라지기 때문이어서일 것이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정적 감정의 원인이 친구의 얘기가 아닌, 그 해석의 결과라는 것이다. (나는 어떤 인물을 부정적 감정으로 만든 친구의 얘기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정적 감정은 결국 우리의 부정적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론 자격지심을 가져서 악의 없는 말에도 종종 기분이 상하곤 한다.) 나는 이러한 논의에서 도덕성에 대한 논의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논의까지 하지는 않겠다.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서 말한 부정적&긍정적 믿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개인'이 받아들이는 방식에 근거한다. 이 말의 뜻은 같은 믿음을 가진 두 사람이 있더라도, 그 믿음에서 촉발되는 믿음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믿음이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어떠한 믿음이 불러오는 감정의 양상도 항상 절대적일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주관성에 근거하는 '믿음'인데도 우수하고 우수하지 않은 믿음이 존재할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일상적 예시를 들어보겠다.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라는 믿음은 단순히 그 자체로 부정적, 긍정적 믿음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라는 믿음 자체로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감정이 나타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는 믿음이 실현된 상태라면, 실제로 긍정적인 상태에 놓인, 긍정적 믿음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어떠한 믿음은, 촉발되는 감정의 양상에 따라서 항상 부정적, 긍정적 믿음으로 변질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믿음이 우수한 믿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믿음은 "돈이 없으면"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장은 어떠한 믿음이 긍정적 믿음으로 현존한다고 해서, 그 믿음의 우수성을 보증하는 것만은 아니다.

즉 내가 주장하는 말은, 이러한 우수하지 못한 믿음들에서 벗어나고, 우수한 믿음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행복에 도다를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우수한 믿음은 앞서 말한 예시와 반대되는 것을 말한다. 어떠한 믿음과 자신 스스로가 대립되어 모순에 빠지지 않게 하는, 그러한 믿음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모든 믿음을 우수한 믿음으로 바꿀 수는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쉽지 않은 일이고, 많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기존 질서를 거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린 이런 기존의 믿음들을 완전히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우수한 믿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 만으로는 이러한 기존 믿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어려우므로, 다른 해결책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 해결책 중 첫 번째로는 '우수하지 않은 믿음의 약화'이다. 이 믿음의 약화를 해결책으로 주장하는 이유는, 믿음의 약화는 '없는 것'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지만 흐릿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믿음을 약화시킴으로써 그 믿음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초이성>
앞서 감성과 이성을 설명하고, 그것들에 따른 믿음의 형성 과정을 서술했다. 믿음의 형성은 욕구적 감성을 시발점으로 해서 이뤄지며, 이성은 감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된다. 이러한 믿음 형성은 우리가 그 믿음 형성의 과정을 인식하기 전까지 필연적이고 운명적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필연성은 통제 불가능한 감성의 횡포로 인해 일어난다. 통제불가능한 원인이 어떤 통제불가능한 결과를 만들고, 그 결과를 원인으로 삼는 새로운 결과.. 가 삶의 시작에서 죽음까지 계속 일어난다. 우리는 그러한 연쇄고리를 절대로 끊을 수 없으며 이러한 과정은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성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운명적으로 정해진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나는 여기서 이 개념을 서술하기 위해 다른 이성의 개념을 제시한다. 바로 초이성이다. 초이성은 스스로를 자각, 인식하는 이성이다. 이 초이성의 개념은 앞서 설명한 감성의 노예인 이성의 역할을 넘어서는 개념이 된다. 초이성은 스스로의 감성을 자각할 수 있다. 스스로의 생각을 자각할 수 있다. 스스로의 행위를 자각할 수 있다. 초이성은 스스로 행하는 모든 것을 자각할 수 있다. 초이성만이 감성의 횡포를 지각할 수 있다. 초이성은 감성이 형성한 '자아'를 자각함으로써 그 횡포를 깨닫는다. 감성은 이성을 이용해 스스로의 자아를 구축하며 그 자아는 '나'가 있다는 느낌을 만든다. 그 느낌은 인간이 스스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만들며, '나'가 실재한다고 믿게 만든다. 우리는 초이성 없이는 그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감성을 통제할 수 없으며, 오직 감성만이 이성을 통제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성(머리로 앎)을 발휘하더라도 감성을 통제할 수 없으므로 결국 우리는 계속해서 기존 믿음에 머무르게 된다.
초이성은 그러한 감성의 작용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 주며, 그 과정이 폭력적인 통제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한 깨달음의 과정은 감성이 형성한 자아만이  인간 자체라는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나게 하며, 감성의 횡포를 약화시킨다. 초자아는 제삼자의 시선에서 부풀려진 자아를 확인케 한다.

<믿음을 약화하는 방법>
믿음을 약화하는 방법은 스스로의 자아가 감성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초이성만이 할 수 있다. 우리는 초이성의 능력을 명상과 스스로를 알아차림으로 기를 수 있다. 계속해서 감성이 형성한 자아를 관찰함으로써 그 자아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는 싯다르타(부처)의 사상이 영향을 주었다. 또한 나의 생각과 싯다르타의 사상적 결론이 거의 다르지 않다. 나의 주장은 싯다르타의 사상보다 빈틈이 많으므로, 싯다르타의 사상을 직접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삶이란 바다에서 행복이란 목적지를 상실하고 하염없이 부유하지 마라. 왜냐하면 당신이 어딘가를 목적지라고 믿는 순간, 어느새 목적지가 그곳이 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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