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권의 정당화
부모는 자식을 올바르게 교육할 의무가 있다. 그 올바름의 기준은, 모든 타인을 관찰해야 비로소 완전하게 정립된다. 그러나 인간은 관찰할 수 있는 타인의 수에 한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러한 의무는 반드시 완전하게 이행되어야만 하는 것임에도, 불안정한 이행을 할 수밖에 없다. *올바른 교육은 철저히 평준화된 것을 의미한다. 모든 타인을 관찰함으로써 얻어진 기준은 평준화되었으나, 모든 타인을 관찰하여 얻은 기준이므로, 개별자의 차이를 존중하게 된다. 중국인들이 중국인들만 관찰했을 때 유럽인들과의 차이는 존중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화된 지구촌에서는 개별자들 간 차이가 존중된다.
따라서 이 의무의 불안정성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더 올바름에 가까워진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 올바름에 가까워졌다는 것의 의미는 더 많은 타인을 포섭하여 평준화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의무는 가능한 한 최대로 이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부모는 더 올바름에 가까워진 기준이 있다면 반드시 그쪽으로 몸을 옮겨야 한다. 학교는 보다 더 올바름에 가까워진 기준을 제시하는, 국가 내에서 사실상 유일한 기관으로 기능한다. 부모는 스스로의 의무를 보다 완전하게 이행하기 위해서 반드시 자식을 학교에 보내야만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학교는 부모의 의무 중 일부를 자처하고, 부모는 이에 반드시 동의해야만 한다. 그러면서 부모의 교육할 의무 중 일부는 대신 학교가 이행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학교는 더 올바름에 가까워진 기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권위를 갖는다. 이러한 권위는 학교의 소속된 이들인 교원들에게도 전해진다. 교권 침해는 이러한 권위가 침해되었을 때 문제시 되는 것이다. 사교육의 발달은 교권 침해다. 왜냐하면 공교육의 권위는 더 올바름에 가까운 기준을 제시함에서 나오는데, 사교육이 발달하면 이를 추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이 반항하는 것이 교권 침해라고 보기는 애매한 여지가 있다. 반항의 정도가 심해지면, 교권을 넘어 사회적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므로, 교권 침해보다 더 큰 문제가 된다. 반면 반항의 정도가 적다면 교권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부모-자식 관계는 학교(교사)-학생 관계로 나타난다. 부모-자식 관계가 유연성을 갖듯이, 학교(교사)-학생 관계도 유연성을 갖는다. 그러나 교육할 의무 중 일부만 양도했으므로, 부모-자식 관계에 비해 학교(교사)-학생 관계는 턱없이 유연성이 낮다. 따라서 유연성 안에서 교육할 의무를 다할 뿐이지, 그 유연성을 넘어서면 부러뜨려도 된다. 유연성을 넘기는 순간, 학교-학생 관계는 의미가 없어지고, 학교와 학생은 개별적이게 변한다. 유연성이 높다는 것은 부모의 의무를 학교가 더 많이 대신 이행하고 있음을 말하며, 이러한 유연성은 사회적인 관념, 편견, 사상 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