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유물론,언어,정치

검은야망 2024. 6. 10. 16:16

1. 마주침의 유물론
모든 물질은 그 자체로는 모든 가능성이 중첩된 상태이나 다른 물질과의 마주침(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가능성으로 응고된다. 이러한 마주침은 순수하게 우연적인 것이다. 이 응고는 우주 전체의 물질의 무질서도인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마주침과 응고는 물질 세계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 물질적 흐름에 비추어 봤을 때 생명체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도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흐름 하에서 우연한 상호작용을 통한 물질들의 응고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생명은 무질서도(엔트로피)를 감소시킨다는 것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 물질적인 흐름에 저항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엔트로피에 저항할 수 있다는 뜻은 무질서도의 증가 흐름에 따른 우연적인 마주침들에서 벗어나서 다른 상호작용을 이끌어낼 수 있음을 시사할 수 있다. 이는 생명이 단순히 물리적 세계의 흐름에 순응하지 않기에, 주체성을 가질 수 있음을 뜻한다. 물론 생명체의 주위의 물질적 요소들의 환경은 순수하게 우연적인 것이기에, 생명체의 주체성은 완전히 환경과 구조로부터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환경과 구조 내의 물리적 대상들만이 주체적 마주침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주체성의 힘은 철저하게 구조 내부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인간의 두뇌를 살펴보면, 다른 종의 두뇌보다 훨씬 오랜 성숙 기간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다른 생명 종들보다 환경에 적응하며 뇌의 회로를 다르게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특성들을 다룰 때는 단순히 생득적, 종의 특성으로써 바라봐서는 안되며 인간들의 주변을 이루는 구조들에 대해서 파악해야만 할 것이다. 인간의 뇌가 성숙해갈 때,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물질적 이미지(시니피앙,기표)들을 감각적 자극을 통해서 받아들인다. 이때 물질적인 기표들의 배치에 따라 아기의 시냅스의 연결이 달라진다. 언어의 습득도 시니피앙(기표)들의 규칙을 습득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물질적인 마주침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2. 시니피앙-시니피에의 논리
시니피앙은 기표이며, 시니피에는 그에 상응하는 기의(개념)이다. 이 시니피앙은 언어의 물질적 실재이며, 순수 차이의 단위라고 볼 수 있다. 구조주의 언어학의 대표주자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는 서로를 대립으로 삼는 시니피앙들의 차이 체계이다. 이때 시니피앙은 서로를 반정립하여 가치를 부여받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니피앙의 반정립은 인간의 인지 활동에 의해서 촉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행동주의에 따르면 시니피앙의 반정립은 보상과 처벌을 통해 타인을 모방, 강화 학습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다. 반면 놈 촘스키의 관점에서는 LAD라는 인간의 생득적 언어 습득 장치가 언어의 최소단위를 통사체로 설정하고 그 통사체들의 병합을 가능하게 한다고 본다. 어쨌든 큰 틀에서 시니피앙은 물질적 실재로 반정립됨으로써 언어의 차이 단위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소쉬르에 의하면 이러한 시니피앙에 시니피에가 결합됨으로써 완전한 기호를 이루는 의미작용이 일어나며, 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는 전적으로 자의적인 연결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론에서 나아간 사상가는 자크 라캉과 자크 데리다가 있다. 그중 자크 라캉의 사상을 들여다보겠다. 자크 라캉에 의하면 시니피앙은 어떤 연쇄적 사슬의 형태, 서로 간의 변별적 체계 속의 대립을 통해서만 가치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이 시니피앙 간의 대립은 한번에 완성되어 고정된 것이 아니라서, 상호작용이 계속해서 일어나면서 첨가되거나 재결합되며 의미를 지연시킬 수있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는 항상 완전히 결합되어 고정적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가변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럼에도 시니피앙의 관계에서 의미가 어느정도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이유는 누빔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누빔점은 체계가 반복됨으로써 나타나는 언어 사용의 용례가 생기면서 나타난다. 이는 리오타르가 말한 서사지식의 정당화와 맥락이 같다. 리오타르는 그냥 과거부터 행해졌기에 실행되는 형태의 지식에 대해서 사유했는데, 누빔점도 기표와 기의 사이의 필연적 관계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거부터 행해졌기에 연결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언어적인 구조 체계는 라캉은 상징계라고 부르고 있다. 단 이러한 인간의 언어 체계의 구성도 마주침의 유물론에 근거하며, 물질적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상징계는 언어를 통해서 물질적 이미지와 관념을 연결해주며 인간을 분별 체계로써 관념을 잘 다룰 수 있게 해준다. 그러면서 언어를 사용할 때마다 인간은 항상 상징계의 언어 체계의 영향 하에 놓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사유, 대상, 자아를 갖기 위해서 기표와의 동일시를 필요로 한다. 라캉은 이 동일시의 작용을 상징적 동일시라고 말하며, 동일시된 기표를 자아 이상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인간은 물질적인 토대, 상징계를 통해서 스스로를 대상으로 삼아 스스로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인간은 주체로 거듭나며 이는 상징적 질서에 의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시는 결국 스스로를 관념적으로 다루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며, 동일화된 기표는 '나'가 아니기 때문에 주체는 불완전한 것이다. 이런 인간 주체는 자신이 있는 상징계와 주변의 대상들과 물질적으로 상호작용 한다. 단 이러한 경우 상징계,물질적 구조에 지배받는 주체이다. 그럼에도 주체인 이유는 마주침의 우연성을 불완전하게나마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3.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신화)는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의미작용에서 2차 질서 중 하나이다. 의미작용의 1차 질서는 기호와 기의의 단순 표상 관계를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모래/라는 기표를 통해 외시적 의미인 모래의 표상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는 현실,자연의 수준이며 기초적 표상의 세계에 속한다. 반면 2차 질서는 기표와 기의가 함축하고 있는 특성으로부터 비롯한다. 함축은 기표의 2차 의미작용으로, 사람의 상징적 질서, 문화적 배경, 체험의 경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토목 건축업자는 한 알의 모래에서 담벼락을 표상해내지만, 반도체 공학자는 모래에서 인공 통신 조직을 표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함축의미는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주관적 체험에 따라 달라진다. 이에 기반하여 바르트의 신화론을 논하면 신화는 함축적 기의들을 서사의 형태로 일련의 고리를 이룬 것이다. 자주 나오는 예시로 프랑스 군복을 입은 병사가 경례하고 있는 포스터가 있다. 외시적인 기표-기의 관계에 기반했을 때는 단순히 프랑스 군복을 입은 병사의 경례이다. 하지만 그 근저에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정당화라는 함축적 의미가 서사의 형태로 숨어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롤랑 바르트의 관점에서는 권력의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언어의 관점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기표들이 일으키는 1차적 기의들의 효과를 이용해 기표들을 병치하는것-혹은 병치되는것-으로 이데올로기는 나타날 수 있다. 특정한 기표들을 엮었을 때 맥락적으로 특정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도 신화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특수한 측면은 모든 이들이 정치적이거나 자본적인 효과를 노리고 얼마든지 신화적 서사를 생산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신화가 생산자를 통해서 끊임없이 반복되며 재생산된다. 자본주의는 중심적 권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신화적 효과를 통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정당화할 수 있다. 다시 정리하면, 상징계는 기본적으로 기표와 기표를 환유적인 고리로 연결하며, 기의가 지연됨을 통해서 생기는 함축적 의미가 신화적 효과를 통해 정치적으로 개인에게 침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명확히 타자적인 이데올로기의 영향은 주체의 욕망과 환상을 형성한다.

4. 무의식
무의식은 의식적으로 포착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노출시키고 있는 상징적 질서의 대타자와 기의들의 서사를 내재화하여 암묵적 신화로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들이 포함될 수 있다. 이러한 작용들은 개인 너머에서 타자적으로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한 점에서 무의식은 기표,기의의 구조가 대타자로 주체에게 영향을 행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것 외에도 무의식은 유전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생득적 본성이나 뇌에서 의식하지 않은 채로 일어나고 있는 단순한 활동 등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무의식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주체에게 영향을 가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5. 실재
인간은 생득적으로 혹은 진화적으로 얻어졌을 수 있는 어떤 이성적 순수형식을 활용하여 감각을 통해 대상들을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의 범주에는 상징계적으로 시니피앙이 대립됨으로써 나타나는 차이가 기여할 수 있다. 과학적으로 보면 인간이 감각하고 인식할 수 있는 물질적인 것들은 한정적이다. 시각을 예를 들면 인간은 가시광선에 속하는 빛만을 볼 수 있다. 개는 흑백만을 인식할 수 있으며, 색맹은 색을 왜곡해서 본다. 이처럼 인간이 갖고 있는 물리적 기관의 형태에 따라 같은 물리적 실재를 다루더라도 인식 결과는 상이할 수 있다. 이것이 시사하는 점은 실재적 세계-칸트가 말하는 물자체-는 말 그대로 상상할 수 없는 카오스의 모습을 갖추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기관을 통해 인식이 이뤄지지만 그 기관의 렌즈에 의해 실재가 다르게 인식되기 떄문이다. 이러한 물질적 실재는 끊임없이 무질서해지며 에너지를 분출하는 상상할 수 없는 형태를 띌 지 모른다. 다만 관념적 측면에서 범주를 변환했을 때 새로운 형태의 인식들를 포착해낼 수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는 토마스 쿤의 과학철학적 관점에서 패러다임의 변환과도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인간은 뇌를 발전시켜 인식 능력을 강화하고 언어를 습득하면서 이러한 실재에 외피를 씌운다. 그러나 상징계의 언어 체계는 지연되는 지점이 있으며 완전하지 않기에 균열을 내포하고 있으며, 인간의 인식 범주 또한 마찬가지로 균열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은   마약이나 정신질환에 의해서 환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재는 이러한 점에서 항상 인식될 수 없는 것, 언어화될 수 없는 것으로 너머에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실재는 물질적인 힘을 발휘하는 장이면서 인간 능력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실재는 인식과 언어의 범주에 비해 무질서해 보이는 잠재성의 세계이다. 이러한 실재의 세계는 높은 에너지의 상태로 나타난다.
실재는 태양같이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며 물질적 대상들에게 에너지를 준다.

6.창조적 주체의 정치
앞선 결론들에 의하면 주체성을 가졌다는 주체도 결국 우연적인 물질적인 구조에 영향받는 꼭두각시같이 기표들의 작용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휘둘리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마주침의 유물론에 의한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정녕 극복될 수 없는 것인가? 인간은 생명을 가진 주체로 단순한 마주침들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이 힘은 무질서해지는 물질적 흐름에 저항하여 에너지를 계속해서 응축해서 유지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러한 힘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될 뿐 이데올로기에 저항할 수 있는 진정한 주체가 되는 힘을 주기엔 부족하다. 따라서 상징적 질서, 의미작용의 균열에서 작용하고 있는 실재에서 비집고 올라오는 에너지를 포착해야 한다. 이는 체계 내의 모순을 감성을 통해 감각하라는 말과도 같다. 그러한 실재 너머의 힘은 언어와 이성적 인식 능력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성적인 힘으로써 나타난다. 이러한 감성의 힘의 사유는 죽음,불안,충격,몰입 등을 통해서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패러다임을 전복시켜 새로운 인식체계와 패러다임을 형성할 것을 요청한다. 이는 창조성이며, 창조성이 추동될 때 인간은 비로써 단순히 물질적 요소에 이데올로기적인 인식적 해석을 뛰어넘을 수 있으며, 비로소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창조성의 주체는 저항하는 예술가와도 같다. 사회에 끊임없이 창조적인 형태로 영향을 가하려고 해야 한다. 이러한 창조적 영향은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혁명은 미시적으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뤄질 수도 있으며, 거시적으로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이뤄질 수도 있다. 다만 이러한 창조적 주체는 단순히 비판에서 머물면 안되며, 크던 작던 대안적 새로운 이념적인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의 창조적 패러다임의 전환은 언제나 이데올로기에 직접적으로 행하며 영향받는 대중들에게 영향을 가할 수 있어야 한다. 대중들의 이데올로기,패러다임,상징적 질서가 권력이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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