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개인의 시대?

검은야망 2025. 1. 30. 15:20

21세기는 자아의 시대다. 대부분의 욕망은 자아를 중심으로 형성되며, 그것에 충성한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무엇을 사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많은 충동들이 오직 자아를 경유하는 방식으로 통제된다. 이러한 경유 방식이 ‘개인’이라는 개념과 만나게 되면, 자아 뒤에 숨겨진 이데올로기는 쉽게 가려진다.

"내가 원하는 거야."
"그런데 네가 왜 방해하는 거지?"

자아가 득세할 때, 자아를 전염시키는 타자의 효과는 종종 간과된다. 타자의 영향은 확고한 주체가 존재할 때만 인식되며, 주체 이면의 이데올로기들은 끊임없이 무시된다. 이 때문에, 어떤 신화가 나의 사고를 지속적으로 전염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그것을 포착하지 못한다. 신화는 종종 개인의 삶에 침투하여 그것을 결정짓고, 신화에 유혹된 개인은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느낀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신화의 구조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신화에 대한 성찰을 방해하는 신화, 즉 **"원천 봉쇄적 신화"**일 경우,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원천 봉쇄적 신화는 신화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치로, 일종의 종교적 구조를 띤다. 예를 들면,

**"현대 사상은 종점에 도달했다."**라는 테제,
**"현재의 사상이 가장 우월하다."**라는 테제,
**"집단의 이익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집단주의적 테제,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특정한 전제들,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종교적 미신들.

이러한 신화들은 타자의 언어를 재생산하며, 개인이 또 다른 타자로 전환됨으로써 나타난다.

A: "당연히 이런 생각이 맞는 거 아니야?"
B: "...그게 맞아? 아닌 것 같은데."
A: "상식이 부족한 거 아니야? 당연히 이렇게 행동해야지."
B: "..."

B: "당연히 이런 생각이 맞는 거 아니야?"
C: (...)

위의 대화처럼, 원천 봉쇄적 신화는 많은 경우 "당연히," "상식적으로," "통념에 따르면" 등의 표현을 근거로 무작정 옹호된다. 하나의 원천 봉쇄적 신화가 한 명의 전달자를 중심으로 영역을 구축할 때, 그 영역은 집단이 된다. 이는 담론의 경계 짓기이며, 집단과 집단이 아닌 것의 구분을 형성한다. 영역 바깥은 그들이 옹호하는 신념으로부터 종종 배타적이며, 집단 내부의 사람들은 신화적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그 내부에 머물기를 원한다. 집단이 형성되면 그 경계를 넘는 존재들은 **"적," "괴물," "침입자"**로 간주되기 쉽다. 그러므로 개인주의는 역설적으로 집단적 경계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된다. 개인주의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거대한 역사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집단주의를 해체하기보다 오히려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개인주의는 결과적으로 집단주의에 봉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 정치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특정한 정치적 슬로건을 옹호하는 후보자들의 모습을 보라.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에 아무런 근거 없이 절대적 필연성을 부여하지 않는가? 정치적 갈등은 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되지 않는가? 그리고 그 집단 내부의 의원들이나 지지자들은 오직 집단 내부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민주주의는 커다란 파시즘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버마스가 기대한 변증법적 종합은 개인주의적 이데올로기 내부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대신, 하나의 영토가 또 다른 영토를 제국주의적으로 삼키는 형태의 정치가 등장할 가능성이 더 크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가진 파시즘적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미시적 차원에서 이방인을 환대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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