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에로스‘ 개념의 탐구
플라톤은 향연에서 에로스를 ‘결여로부터 지로 향하는 힘’이라고 규정한다. 즉, 에로스는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를 소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동력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그 자체로 논쟁적이다. 만약 에로스가 단순한 결여라면, 우리는 결여된 모든 것을 욕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의 욕망은 그러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으며, 오히려 특정한 방식으로 결여를 경험할 때 욕망을 느낀다. 그렇다면 에로스의 본질은 단순한 소유의 충동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존재론적 긴장을 내포하는 것이 아닐까?
1. 결여의 구조: 에로스는 무엇을 향하는가?
에로스는 흔히 결여된 대상을 향한다고 이해된다. 하지만 단순히 결여된 것 자체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결여를 통해 떠오르는 어떤 이상적 대상, 즉 가상적인 영원한 대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우리는 단순히 연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연인을 통해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근원적 결핍을 인식한다. 마찬가지로, 철학자가 지혜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는 단순히 특정한 앎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앎 자체를 향한 불가능한 도달을 지속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결여의 운동을 ‘영원성의 사랑’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불멸을 동경하며, 지식과 미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절대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영원성이란 개념 자체가 결여의 산물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항상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실의 순간에야 그것을 의식한다. 어떤 존재가 너무 익숙해져 내 일부가 되면, 나는 그것을 더 이상 열정적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반면, 상실의 순간 그것의 영원성을 역설적으로 상기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사랑하는 것은 영원성이 아니라, 영원성이 결여된 순간의 기억이 아닐까?
2. 불멸애와 멜랑콜리
만약 우리가 영원한 것에 대한 사랑을 욕망한다면, 왜 그것을 소유한 후에도 사랑이 지속되지 않을까? 오히려 상실의 순간, 혹은 도달할 수 없는 순간에 사랑은 더욱 선명해진다. 불멸애란 일종의 멜랑콜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플라톤은 영원성을 향한 사랑을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도달 불가능한 것을 향한 욕망이 만든 허상일 수도 있다.
이는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추한 것에 대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주장과도 연결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연인의 추한 모습이나 거지의 불행을 사랑하지 않는가? 우리는 그들의 불완전함을 연민하며, 그로 인해 자신의 것을 베풀지 않는가? 반대로,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미워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 앞에서 우리의 미약함만을 상기할 뿐이다. 그렇다면 에로스의 본질은 단순한 대상의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결여를 스스로 상기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3. 정신과 육체: 플라톤의 오류
플라톤은 이러한 에로스를 궁극적으로 정신적 사랑으로 승화시킨다. 그는 육체적 사랑을 열등한 것으로, 정신적 사랑을 고귀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만약 영원한 것에 대한 사랑이 허상이라면, 정신적 가치가 몸적 가치보다 더 위대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플라톤은 ‘우리는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육체를 넘어, 정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신이 과연 육체보다 더 영원한가? 육체는 쇠퇴하지만, 정신도 망각된다. 기억되지 않는 정신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오히려 육체적 감각을 통해 존재를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만약 플라톤이 정신을 강조한 것이 단순한 철학적 논리 때문이 아니라, 그의 외모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육체적 아름다움을 경멸하고, 정신적 가치를 강조한 것은 아닐까? 이는 단순한 심리적 가정이 아니라, 철학이 어디까지 개인의 경험에 기초하는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4. 에로스의 전복: 상실의 긍정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에로스를 결여와 영원성, 소유와 상실의 관점에서 재검토했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에로스를 전복하는 방향은 무엇일까? 우리는 단순히 결여를 해소하려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결여를 직시하는 존재이다.
에로스는 단순히 대상을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여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이며, 결여의 운동 자체를 긍정하는 힘이다. 플라톤이 보지 못했던 것은, 결여 그 자체를 긍정하는 에로스이다. 우리는 결여를 통해만 욕망할 수 있으며, 소유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소멸시키는 순간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영원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성의 상실을 통해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에로스는 소유가 아니라, 상실 속에서 빛난다. 그것이 플라톤이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던 에로스의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