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믿음에 관하여

검은야망 2021. 12. 15. 16:29

불과 1~2년전까지도, 나는 어느것도 믿지 않았다. 신의 존재는 당연히 믿지 않았고 귀신조차 믿지 않았었다. 그저 사람들이 사기를 치거나 재미를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또 종교를 마음의 안식만을 위한 용도로써 생각했었다. 그랬던 나에게 뜻밖에 일들이 찾아왔다.

 

나는 우연히 신앙심이 깊은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신앙심이 깊은 자들은 무조건 종교를 강요하고, 전도하는 것인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저 두터운 신앙심을 감싼 인자한 미소만이 느껴졌다. 그는 신앙을 강요하지도 않고 그저 남에게 베풀 뿐이었다. 나는 이런 그를 보며 나는 종교란 어떤 것이길래 사람을 베풀게 만들고 남을 사랑하게 만들며 더 나아가 사람의 생각을 바꿔놓을 수가 있는 것인가라는 고민에 빠졌다. 그날부로 기독교(그 분이 기독교였기 때문)에 대해 미친듯이 찾아보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종교에서 가장 믿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기적'이었다. 기적은 과학적으로도 말이 안되는 초자연적 현상인데, 기독교에서는 이 기적에 대해서 실제로 일어난 일로 규정하고 있었다. 난 기적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사기라고 생각했고, 기적이 사실인가 아닌가에 대한 많은 자료들을 찾아보고 분석했다. 하지만 분석은 의미가 없었다. 설렁 그 일이 사실이더라도 단지 과거의 일로 여겨 믿지 않는다면 사실이 아니게 되는 것이었고, 그 일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면 사실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그 모호한 기준 속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신을 믿는 상태와 신을 믿지 않는 상태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난 또 어이없는 상황을 보게 된다.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으러 고속도로를 타서 이동하던 와중 창문으로 서양의 드래곤과 유사한 생물체를 보게 된 것이다. 처음에 드래곤임을 인지 못했지만 2초 후에 드래곤임을 인지하고 핸드폰 카메라를 찾는 순간 드래곤은 저 멀리 하늘로 높게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난 황당했다. 전설속의 생물을 실제로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가족들에게 생생한 그 기억을 바로 가족들에게 진심을 다해 말했지만 가족들은 믿지 않았다. 아무리 생생한 그날의 상황을 자세히 얘기해도 믿지 않았다. 난 그날의 일들을 나중에 집에 온 후 곰곰히 생각했고, 나는 믿음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사실 가족들이 내 말을 믿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갑자기 뜬금포로 드래곤을 봤다고 얘기하는 아들의 말을 누가 믿겠는가. 내 말을 믿기보단 내가 착각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이런 가족들의 태도에서 믿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본 것 말고는 믿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본 것이 사실이고 팩트더라도,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난 드래곤을 본 것이 사실이지만 이 글을 보는 이들이나 가족들은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 말을 믿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도 끊임없이 의심과 갈등할 것이다. 내 말을 믿는 사람도 결국 내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의심을 뽑아내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끊임없이 의심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기적이 사실이고 드래곤의 존재가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마음가짐인 것이고 그 마음가짐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나란 사람은 우연한 기회로 드래곤을 봤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더 깊게 신뢰할 수 있지만 그러한 성스러운 것들을 보지 못한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깊게 신뢰할 수 없을 것이고 끊임없이 의심과의 싸움을 벌여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심을 없애기 위해 예수를 보내 기적을 행사하였지만 그 기적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한테 그 기적조차 의심당하는 것이 정말 신기한 것이다. 

 

나는 내가 드래곤을 봤다는 말을 허무맹랑한 소리로 받아들여도 상관 없다. 왜냐하면 나도 다른 사람이 페가수스를 봤다고 하면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기에 난 거부하지 않는다. 그저 믿음이라는 것이 의심과의 동반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오히려 의심을 뿌리칠 수 있게된다고 생각한다. 의심이 드는 자신의 감정을 당연시 여기고 믿음에 집중한다면 의심은 곧 믿음으로 다시 승화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진정한 믿음을 쟁취하기 위해선 의심을 해야한다는게 내 생각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렇다. 이는 정치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믿기 전에 끝없이 의심해야한다. 누군가를 지지하던 누군가를 신뢰하던 말이다.

end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