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라캉의 비판적 계승

by 검은야망 2024. 4. 12.

라캉은 각각의 계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나누었다. 그런데 나는 이를 기표의 계과 기의의 계, 그리고 기표도 기의도 아닌 계로 나누고 싶다. 이를 나는 사교계, 의미계, 실재계로 표현하려고 한다. 따라서 나의 논의는 라캉적일 수도 있으면서, 라캉의 이론에 위배되는 것들을 내포하고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알리고 싶다. 따라서 라캉의 개념과 너무 혼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인간은 먼저 태어나면서 사교계에 도달한다. 사교계는 기표, 이미지들이 표현되는 계이다. 우리는 이 계에서 단지 타자의 이미지를 따라 행위한다. 우리는 이 위치에서 타자의 행위를 의심하지도, 의미를 찾지도 않는다. 단지 표현에 따라 행위한다. 그렇기에 해석작용도 없다. 단지 누군가를 따라서 움직일 뿐이다. 이 '누군가'는 처음 마주하는 타자인 '어머니'가 되는데, 우리는 어머니의 행위를 의심하지 않고 따르고 체화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계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대상화시키고 타자화시키는데, 여기서 타자화된 나가 자아이다. (자아는 거울속의 이미지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나타난다.) 인간은 스스로를 대상화시켜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다루려면, 대상화된 나가 필요하다. 모든 타자는 사교계에 위치한다. 이 사교계는 문화, 관습 등의 구조에 해당하는데, 문화와 관습은 단순히 행해짐으로써 정당화된다.

인간은 언어를 얻으면서 의미계와 사교계 사이에 위치하게 된다. 이 말뜻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기표를 해석하여 기의를 형성하려고 하는 중간다리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의미계는 기의가 생성되는 계이며, 이 기의는 전적으로 언어적 구조의 영향 하에서 형성된다. 그렇다면 언어는 어디에 있는가? 언어는 주체의 위치와 동일한 곳에 있다. 인간은 비로소 언어를 얻음으로써 주체가 되는데, 이 주체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 있다. 언어도 마찬가지로, 기표와 기의 사이에 있다. 언어의 위치와 주체의 위치는 동일하며, 언어적 구조가 곧 주체의 구조이다. 주체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연결을 꽤 거친 방식으로 용례를 쌓으며 기표가 기표를 지시하고 있는 사교계로부터 의미를 추출한다. 이런 주체는 전적으로 사교계의 영향 하에서 언어를 얻는데, 이 언어는 전적으로 사교계의 구조로부터 얻은 것이다. (이런 언어는 어느정도 수렴점에 도달해있는데, 수렴점에 도달해있다는 뜻은 기표와 기의가 어느정도 일대일 대응된다는 뜻이다.)언어도 결국 타자가 기표를 다루는 방법을 보며 획득된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보편성은 사교계에서 온다. 주체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 있으면서 기표들이 나타나는 사교계를 회의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사교계가 기표간의 관계만을 지시하고 있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발생한다. 이것이 사교계와 의미계 사이의 본래적 구멍이며, 주체는 이 구멍을 언어를 통한 의미작용으로 메워낸다. 이해는 사교계와 의미계의 구멍을 메우면서 이뤄지는데, 인간은 이러한 이해를 축적하면서 하나의 의미 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 의미작용은 물음과 피로에 의해서 촉구된다. 물음은 주체가 언어를 얻은 후에 사교계의 기표를 의문시하며 던지게 되는 질문행위이다. 주체는 이 물음을 통해서 답을 생성하여 의미를 구축한다. 피로는 사교계와 의미계 사이에 서있는 주체가 사교계의 규칙을 단지 이행하기만 했을 때 느끼는 공허함이다. 주체는 이 피로를 느끼고 사교계의 규칙을 문제시하게 된다. 그러면서 주체는 주체만의 의미를 형성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의미 형성마저도 전적으로 언어적이고 구조의 영향 하에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주체는 기의와 기표 사이의 언어적인 존재이며, 기표와 기의 사이의 단절, 구멍을 메워가려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구멍은 영원히 메워지지 않는 욕망의 원인이 되며, 환상을 형성한다. 주체는 환상의 지점에서 스스로 자랑스러워 할 것이라고 여기며 그를 쫓는다. 그러나 그 환상에 도달했을 때 그 환상의 대상은 사라져있다. 라캉은 그 비어있는 구멍을 대상 a라고 부른다. 대상 a는 전적으로 비어있는 것이지만, 마치 대상과 같이 추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치 양공같은 것이다. 양공은 비어있지만 전자가 이동하는 것과 같이 전하 나르개로써 여겨진다. 대상 a도 비슷하게 대상이 아닌 비어있는 것이지만, 대상으로써 추구된다.

주체는 계속해서 계속해서 기표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어느 순간 이해가 되지 않는, 불가해한 지점을 마주한다. 이 불가해한 지점은 의미작용이 이뤄지지 않는 지점이다. 기존의 언어 구조 내에서 형성한 의미로는 더이상 설명할 수 없는 지점이다. 이를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주체가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주체는 그동안 붙들어왔던 모든 의미 체계를 상실한다. 철저한 허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주체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주체는 이해를 포기한다. 이 이해가 되지 않는 지점에서 주체는 철저한 불쾌를 느끼며, 극단적 우울을 겪는다. 이 지점은 주체가 의미계와 실재계 사이에 있는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주체는 다시 다른 종교와 같은 의미 체계를 수용하여 이 실재계로부터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기도 한다.(이 경우 더욱 강력한 환상이 주체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일부는 이 지점에서 완전히 일어서지 못하고 자살한다. 무의미의 늪에서 헤엄치는 것은 극도로 고통스럽고 불쾌한 것이다. 만약 단순히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라면, 라캉은 이 실재계에 극도로 무한한 향락을 놓았는가? 실은 이 허무는 꽤나 즐길만한 것이다. 허무의 극한은 기존에 종속되어 있는 의미 체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이는 극한의 자유이기도 하며, 모든 것이 나로부터 생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 사상과도 유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체는 환상을 횡단하고 이 죽음을 견디려고 한다. 이 죽음은 너무나도 무겁고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의존하고 믿고 있었던 의미 체계를 부숴버리는 것이다. 주체가 철저한 해체를 겪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주체로써 거듭난다. 종속되어 있던 의미체계와 환상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런 '벗어난 주체'가 되더라도 여전히 언어를 사용하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 놓여있는 것은 불변하기에,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벗어난 주체는 이제 그 불편한 동행을 안을 수 있다. 그를 긍정할 수 있다. 벗어난 주체는 의미체계에서 종속되어 있으면서, 종속되어 있지 않다. 벗어난 주체는 의미 체계와 의미화가 불가능한 그 구멍 사이에 위치하기를 택한다.

728x90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을 먹고 자란다는 것  (0) 2024.04.17
사교계 초기 아이디어  (0) 2024.04.14
라캉: 소쉬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0) 2024.04.05
철학 체계 정리-1  (0) 2024.03.27
차이에 관해서  (0) 2024.03.2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