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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신화와 유혹

by 검은야망 2024. 11. 27.

<1> 인간이라는 신화

인간이란 하나의 기호이며, 신화이다. 의식은 지향성을 통해 의식에 현시되는 기표들의 운행을 조작한다. 의식이란 일종의 무대이며, 기표들은 그 위에서 끊임없이 다음을 지시해나가며, 어떠한 극을 위한 준비 상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기표는 항상 그 자체로 유의미해지지 않기에, 기표를 유의미한 단위로 만들기 위해서 주체의 주관적 부호화가 필요하다. 기표는 인간의 인식 작용에 의해 분절되어 서로 다른 개체로 인식되기도 하고, 총체적이거나 하나로 여겨질 수 있는 무언가로 인식되기도 한다. 주관적 부호화는 이러한 무질서한 기표들을 하나의 의미 단위로 구성해서 ‘기호’의 구성 요소로 기표가 기능할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의미의 단위로 기능할 준비가 된 기표들은 어떠한 상징 체계와 결합할 때 일대일 대응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의식의 시간성에 따라 기표는 기표에서 이행되어가며, 하나의 이야기, 서사 구조를 띄게 된다. 상징 체계에서 어떠한 의미를 획득한 기호들은 다른 기호들과 서사적 구조 내부에 위치함으로써 ‘서사’라는 틀로 묶이게 된다. 이러한 서사적인 기호들의 이야기가 신화이며, 이러한 신화는 기표들의 배치들의 양상에 따라, 어떠한 기표들 너머에서 이면적 의미로, 기표가 아닌 상태로 무언가를 드러내게 되고, 암시한다. 이러한 기표들은 어떠한 연출에 의해 신화로 재탄생하는데, 연출은 기표들을 신화로 기능하게 하기 위해서 기표들을 장치화 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연출들은 상상력에 근거하여 기표와 기표들의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이뤄지며, 상상력은 다시 개체의 경험에 근거하면서 그 상상력의 토대를 갖게 된다. 물론, 개체의 경험은 직접적 경험을 통해 주체가 얻게 된 육체적이거나 관념적인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암묵적 차원의 지식일 수도 있으나, 간접적 경험(TV, 드라마, 유튜브, 책 등)을 통해서 얻은 지식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서, 간접적 경험의 기반은 또 다른 신화가 된다. 신화가 다른 신화를 재생산하는 구조도 가능한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인간은 상징 체계를 매개해서 얻어낸 단일적 의미들을 이용해서 기표들을 배치해내고 발화하거나 생각함으로써 작은 이야기들을 생산해낸다. 여기서 작은 이야기들도 물론 신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작은 이야기들은 담화의 장에 침투하고, 그러한 침투로 인해서 다시금 인간은 장 위를 떠도는 신화적 이야기들을 인식하고 재구성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신화의 생산자이면서도, 연출자이면서도, 수용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다양한 신화들을 이미지같은 형태로 축적하고 내면화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미지들은 다양한 신화들을 하나의 기표로 압축하여 다룰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렇게 압축된 기표는 다시 장치가 되어 신화를 복합적인 것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신화가 치환되거나 압축되는 과정에서 진실은 덧칠된 기표들에 의해 가려져, 어떠한 기표가 왜 그러한 이미지를 갖는지 알 수 없게 되기도 하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기표와 표면적 의미 뒤에 신화는 종종 스스로를 숨기고 있으며, 이렇게 숨은 신화를 파악하고 재신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쨌든, 이러한 점이 시사하는 것은, 기표는 단순히 단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압축된 신화를 갖고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압축성이 신화를 복합적으로 연출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우리가 독자적으로 생각되는 기표를 만들어낼 때, 기표는 독자적으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신화적 이해를 지향하는 한 그것은 항상 독자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압축된 신화들을 통해 기표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압축된 신화가 기호화될 때, 우리는 기호를 통해 단순히 의미를 파악할 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머니’라는 단어는 수많은 신화들이 압축되어 있다. 어머니가 해주신 밥, 나이 드신 어머니, 누군가가 어머니를 잃고 슬픔에 젖은 이야기 등. 우리는 이렇게 압축된 신화들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정교하게 어떤 이야기라고 말을 하지 못하지만, 그 뒤에 숨어있는 꺼내기 어려운 듯한 어떠한 이야기들을 연상할 수 있게 된다. 기표 뒤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침묵한 채로 시끌벅적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이러한 목소리들은 너무 섞여있고 혼란스러워서 어떤 이야기가 어디서 왔는지 알기 어렵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압축도, 기표들을 배치함으로써 하나의 신화적 구조를 만들어 낸 후에 반복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반복이 중요한데, 반복은 자연스럽게 신화가 인공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해내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만들어진 신화도 소급하다보면 어떠한 자연적인 것에 기초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소급은 신화가 스스로를 드러낼때나 가능할 것 같다. 기표 뒤의 신화는 항상 스스로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서, 우리는 축적되어 있지만 알아내기 어려운 이면적인 신화에 따라 기표들을 인식하며, 이것을 ‘신화적 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새로운 개념들을 창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것은, 기존의 전통적 신화에 흠집을 내고 창조적인 사유로 나아가기 위해서 기표에 새로운 신화를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 것과 같다. 기표에 기입된 새로운 신화는 새로운 인식을 이끌어내고, 기존 전통적 인식들에 대해 재검토할 기회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화의 또 다른 특성 중 하나는 유혹이다. 신화는 항상 신화의 수용자를 유혹해냄으로써 신화의 수용자를 취한다. 좋든 싫든,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이해하거나 심지어 미워하고 비난하기 위해서라도, 그 이야기 속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의 수용자는 항상 유혹당하며, 찾아오는 유혹을 뿌리칠지 취할지 생각해야 하는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유혹된 신화 수용자는 신화 속 인물이 되어 신화적 환상에서 연출된 기표들을 만지고 경험하고, 그 연출이 비루하거나 고결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이러한 신화에서 나타나는 유혹의 기표는 대략 2가지 양태로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성스러움과 천박함이다. 이러한 양태의 구분은, 새로운 신화적 이해를 위해 기표에 새로운 신화를 기입한 것이기도 하다.

<2> 유혹의 기표

앞서 설명했듯, 유혹의 기표는 성스러움의 기표와 천박함의 기표로 나뉜다. 먼저, 성스러움의 기표는 피유혹자와의 거리를 유지해낸다. 성스러움의 기표는 객관적 차원에 호소함으로써 스스로를 은폐하고, 어떠한 것을 단지 기술할 뿐이다. 성스러움의 기표는 객관적 차원에 호소하기 때문에 어떠한 이면적 의미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면서도 성스러움의 기표는 이면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암시한다. 이러한 역설적 측면이, 피유혹자로 하여금 이면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스러운 X를 쫓게 만든다. 역설적 행위는 계속해서 피유혹자의 질문을 생산하지만, 성스러움의 기표는 항상 그 질문에 침묵한다. 사실 성스러움의 기표 이면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x는 사실 비어있으며 무엇도 아니다. 종종 무엇을 말하려고자 하는 듯 하지만 사실 기표의 내부는 텅 비어있으며 성스러움의 기표 내부로 들어가서 어떠한 공허를 목격하기 전까지 그것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천박함의 기표는 피유혹자와의 거리감을 깨부수거나 좁힌다. 천박함의 기표는 주관적 차원에 호소함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내고, 어떠한 기술 대신에 정념과 감각을 말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천박함의 기표가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은 항상 알기 쉬운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기표는 꽉 차있고 과잉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천박함의 기표는 피유혹자로 하여금 밀착되어 있다는 감각을 제공하고 강한 이끌림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유혹의 개념들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야기와 신화에 대해서 탐색해보아야 한다.

<3>신화와 이야기

그렇다면 신화란 무엇인가? 내가 파악하기에, 신화는 이야기가 남기고 간 구조이며 형상이자 뼈이다. 즉, 신화는 이야기 자체가 아니며, 신화는 이야기가 발생시키는 효과인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구조에 대해서 탐색해야 한다. 그를 위해서 우리는 소설과 같은 이야기에 대해 사유해볼 수 있다. 소설은 거대한 이야기로, 그 거대한 이야기의 내부에는 각각의 이야기들이 내재해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작은 문장들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들로 구성될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거대 이야기는 각각의 분자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분자 이야기는 다시 원자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여기서 원자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 구조를 담고 있는 문장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원자 이야기의 사례로, “사과가 땅에 떨어지고 있다.” 라는 문장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이야기는 항상 어떠한 운동이나 운동하는 상태를 시간성에 따라서 보여주는데, 이는 이야기가 전적으로 장치들의 진행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에서 시간은 하나의 장치에서 다른 장치로 흐름이 이행될 때 진행된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기표들이 의식의 흐름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과 관련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구조는 곧 기표에서 기표로 이행해나가는 의식의 구조에 대응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대응 구조가 사실이며, 의식의 흐름이 이야기의 구조와 같다고 보았았을 때 우리는 다시 새로운 생각을 얻을 수 있다. 이야기의 구조, 즉 ‘신화’가 의식의 방향성을 결정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신화적 인식’에 대해 이론적으로 증명해내는 것이다. 다시 원래 논의로 돌아가보자. 소설을 구성해내는 원자 이야기들은 각각의 장치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문장에서는 사과, 땅,떨어지고 있다 등이 원자 이야기에서의 기초적 장치가 된다. 이러한 각각의 장치는 기표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의미적 가능성을 중첩시켜놓는다. 장치가 일으키는 기호작용이 연상작용의 고리(연상작용의 고리는 신화와 관련되어 있다.)를 따라가면서 가능한 기의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단순히 장치만 두었을 때 우리는 분명한 의미를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연출을 통해 장치들을 시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장치가 함의하는 다양한 의미론적 가능성은 제한되고 어떠한 의미 고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라캉에 따르면, 이러한 의미 고정점 또한 불완전한 것이다. 이야기에서 의미는 항상 지연되며 균열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균열이 역설적으로 우리가 이야기를 욕망하고 매혹하도록 만드는데, 이것은 라캉이 말한 대상a,잃어버린 팔루스에 대응되는 상징계에서 찾아보려고 해도 끝내 찾을 수 없는 무언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비어있는 의미의 영역에 대응되는 공허한 기표가 바로 성스러움의 기표인 것이며, 그렇게 봤을 때 모든 이야기는 그 자체로 성스럽다. 이러한 성스러움의 효과는 연출에 따라서 극대화되거나 약화되는데, 그것은 연출이 코드화라는 이름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코드 이론에 따르면, 성스러움의 기표는 미달 코딩된 기표에게서 나타난다. 연출은 코드화 작용으로써 장치가 이야기에서 어떠한 코드에 따라 의미와 결합될 지를 결정하며, 의도적으로 모호한 연출을 행함으로써 성스러움의 효과가 극대화되도록 할 수도 있다. 예술은 일반적으로 미달 코드화 된 기호로, 해석자에게 있을 것으로 간주되는 의미의 영역을 탐색하도록 이야기를 직조한다. 반면 과학은 일반적으로 과잉 코드화된 기호로, 과학의 기호는 대부분 외시적 의미와 기표를 관계시키면서 명명백백한 말들을 추구한다. 성스러움의 기표는 이야기가 수용자를 유혹해낼 때 근본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것이다. 성스러움의 기표는 끝내 소유될 수 없으면서 비어있으면서 수용자가 욕망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논의는 프로이트가 말한 의미의 사후작용을 라캉,바르트,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 이론과 관계지어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논의를 더욱이 구체화 시키기 위해서, 앞서 지속적으로 언급한 ‘장치'에 대해서 사유해보아야 할 것이다.


<4> 장치, 진실 그리고 파레시아스트

내가 파악하기에, 장치는 여러가지 가능한 기의가 중첩되어 있는 기호로 보인다. 따라서 단일 장치만이 작용했을 때, 그 의미는 어떠한 지점에서 확정된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장치는 항상 다중으로 관계맺을 때 어떠한 의미를 획득하는데, 이렇게 장치들의 관계나 배치를 설정해주는 것이 연출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떠한 장치가 다른 장치와 연출을 통해 연결되어 나갈때, 이야기는 완전한 의미를 추구하며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내던지게 된다. 이야기가 미래를 향하고, 그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장치들이, 연출을 통해 배치될 때 의미들은 계속해서 과학화되거나 주술적으로 변화하게 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견해는 하이데거와 라캉의 언어에 대한 논의에 부분적으로 빚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간의 실존과 긴밀한 연관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앞서 언급한 의식의 구조와 이야기의 구조에 유사성이 존재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미래로 향해서 나아가듯, 개별 인간의 삶 또한 미래를 향해서 스스로를 던져낸다. (이것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이야기의 관점으로 독해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의 의미는-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배치될 장치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항상 지연된다. 따라서 인간 존재가 서사인 한, 인간의 완전한 의미 추구는 언제나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이것은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기호는 언제나 거짓이다.'라는 말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기호가 항상 거짓이라는 말은, 기호 자체가 항상 완전한 진릿값을 갖지 못하며, 불완전하다는 뜻으로 독해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실의 위치를 문제삼을 수 있게 된다. 진실이란 어디에 있는가? 내 생각에 진실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며, 그것은 현재 너머에 위치하고 있다. 즉, 진실은 추구됨으로써 모습의 일부를 드러내보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진실은 푸코도 논의했던 '파레시아'의 사유와 연결지어 이해해볼 수 있다. 파레시아는 '진실 말하기'라는 뜻을 갖고 있다. 나는 '파레시아'라는 개념이, 진실은 움직임과 흐름 속에서 '드러나는'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말해'지는'것이고, '말해진' 것이 아니다. 진실은 서사가 스스로를 미래를 향해 던져내는 곳, 그 위치에 자리잡음으로써 끊임없는 순간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순간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진실은 아무런 내용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서사를 진행시키기 위한 어떠한 노력,마음씀 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레시아스트는 이러한 서사를 진행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는 자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시대에 군림하고 있는 신화들을 단순히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화들을 끊임없이 재구성해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가 되어야 파레시아스트의 의미에 더욱 부합한다는 말을 함의한다. 그렇다면 파레시아스트는 기존의 신화들을 어떠한 이데올로기로써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신화화되지 않았지만 신화로 기능하고 있는 무언가를 신화로써 포착함으로써 순간의 진실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파레시아스트의 조건인 것이다. 이러한 파레시아스트라는 주체는 단순히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된 주체가 아니며, 어떠한 이데올로기 위에 '올라타는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이데올로기 위에 올라탄다는 것은, 무언가가 이데올로기 혹은 신화라는 사실을 포착한 후에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대해 재사유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텍스트 혹은 신화에 대한 창조적 독해 또는 재신화화하는 작업이 진정한 파레시아적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구체적 논의를 위해 알튀세르의 주체 개념을 검토해보겠다. 알튀세르의 주체 개념은 이데올로기적 호명(interpellation)으로 설명된다. 그는 주체를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보기보다는, 이데올로기라는 체계를 통해 형성되고 규정되는 산물로 이해한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특정한 방식으로 호출하며, 이 호출에 응답하는 순간 개인은 자신을 주체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이 주체는 자신을 자율적이라고 착각할 뿐, 실제로는 이데올로기가 부여한 역할을 내면화한 상태에 불과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주체는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데 기여한다. 예컨대, 경찰의 "거기 서!"라는 외침에 돌아보는 사람은 그 외침에 응답함으로써 법과 질서의 구조 속에서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알튀세르의 주장은 주체가 구조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주체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효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된다.

내가 보기에, 알튀세르는 현존하는 문화적 이데올로기만을 다룸으로써 기존의 이데올로기 또는 시대정신을 벗어날 방향성을 봉쇄했다. 물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현재 나타나고 있는 문화적 현상, 이데올로기적 현상을 분석하는 개념으로써는 탁월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주체는 알튀세르 본인이라는 주체-이데올로기에 대해 말하고 있는-을 간과한 것이다. 즉, 알튀세르가 분석한 주체는 알튀세르 자신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점은 니체가 힘과 의지를 구분한 사유의 뼈를 취하는 방식으로 비판될 수 있다. 알튀세르의 주체는 단순히 '힘'만을 말하고 있지만, 알튀세르라는 주체는 의지로써 스스로의 힘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이론에서 '이론가'라는 자기 자신의 위치를 배제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순히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구조의 산물로써의 주체 뿐만 아니라, 그것을 논의하고 있는 또 다른 주체를 발견하게 되는 것 아닌가? 나는 그러한 주체가 '파레시아스트'이며, 이러한 파레시아스트는 자신의 서사를 진행시키기 위해 노력하려는 자라고 생각한다.내가 보기에, 알튀세르의 작업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어떠한 파레시아적 주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또 다른 이야기의 뼈, 즉 신화를 획득할 뿐 아니라 재구성해야 하며,그렇게 구성된 신화는 다수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신화와는 차이를 갖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를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에게 유혹되어야 하고, 그 이야기들의 장치를 들여다보는 탐색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알튀세르가 말했던 것처럼 단순히 호명된 주체가 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위에 올라탄 주체인 파레시아스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5> 연출된 신화와 파레시아적 신화

파레시아적 실천에서 어떤 이야기에 참여할 것인지, 어떤 신화에 전염될 것인지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따라서 실천을 위한 대략적인 구분을 제안하고자 한다. 그것은 연출적 신화파레시아적 신화다.먼저, 연출적 신화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위해 기획된 신화이며, 익숙한 장치들을 활용해 익숙한 효과를 생산하는 신화다. 이런 신화는 겉으로는 개방적이고 활기를 띠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폐쇄적이고 자기 보존적이다. 연출적 신화는 친숙하고 익숙한 방식으로 주체를 유혹하기 때문에 쉽게 수용되고, 다수성을 통해 강한 대중적 권력을 형성한다. 하지만 이 신화는 자신이 신화적 구조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을 두려워하며, 그러한 이유로 더욱 폐쇄적으로 작동한다. 반대로, 파레시아적 신화는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서사를 진행시키고 진실을 추구하는 신화다. 파레시아적 신화는 다양한 실험과 낯섦이 우글거리며, 기존의 익숙한 신화적 구조를 반복하기보다 그것을 넘어서려 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이데올로기 위에 올라탄 채로 의도적으로 친숙한 신화를 연출하는 전략을 취할 수도 있다. 따라서 신화들을 구분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두 신화는 모두 주체를 유혹하지만, 유혹의 방식이 다르다. 연출적 신화는 쉽게 수용될 수 있도록 다듬어져 있고, 익숙한 감각을 제공하며,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만든다. 반면, 파레시아적 신화는 낯설고 불편하며, 때로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진정한 성스러움을 통해 주체를 신화 속으로 이끌어간다. 그러나 미학적으로 미묘한 지점들이 있어, 두 신화를 항상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특히 연출적 신화도 성스러움의 기표 X를 의도적으로 연출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연출된 성스러움(천박한 성스러움)과 파레시아적 신화의 성스러움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출적 신화의 성스러움은 결국 진실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신화를 지속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는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연출’과 ‘실제 아우라’의 미학적 차이를 파악하는 것과도 연결될 수 있다.) 신화들을 구분하는 것이 항상 쉽지는 않기 때문에—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어쩔 수 없이 연출된 신화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뼈를 들고 나오는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미학적으로 더 깊이 다뤄야 할 필요가 있다.
 

<6> 인간의 삶과 진실 게임

인간의 삶은 서사로 구성되며, 그 서사는 미완의 형태로 끊임없이 전개된다. 각자의 서사는 진실을 말하려 하지만, 그 진실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형되고 지연된다. 이는 단순한 기호학적 문제를 넘어, 신화가 우리의 삶과 경험을 조직하는 구조적 원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신화는 단순한 이야기의 집합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방식이며, 모든 기호들이 엮이며 의미를 창출하는 구조적 장치이다. 신화는 특정한 상징이나 기호를 통해 진리를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직하고, 변형하며, 재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의미를 생산한다. 우리는 신화를 통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삶을 해석하며, 자신의 존재를 정립하려 한다. 그러나 신화적 서사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의미를 생산하는 뼈대로 작동한다. 신화적 서사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신화는 진리와 거짓의 이분법을 넘어, "뼈" 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신화의 뼈는 서사의 기초를 형성하며, 그 위에서 수많은 변주와 해석이 덧붙여지면서 서사는 계속해서 확장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화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요소를 받아들이며 재구성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신화의 뼈대는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경험을 서사적으로 조직하는 원리로 작용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호는 단순한 의미 전달의 매개가 아니라, 신화적 뼈대를 따라 배치되고 조정되는 요소들이다. 기호는 고정된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주되는 과정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진실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기호는 필연적으로 미끄러지고, 신화의 뼈대를 따라가면서 변형되며, 결국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신화는 진실을 찾으려는 시도와, 동시에 진실을 미끄러지게 하는 힘을 동시에 지닌다. 신화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진리를 제공하지 않지만, 진실을 구성할 수 있는 구조적 틀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신화는 완전한 해석을 허용하지 않지만,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으며, 서사를 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토대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파레시아적 태도는 신화의 구조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파레시아적 발화는 단순히 객관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서사를 통해 진실을 구성하고 참여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파레시아의 실천적 태도는 기존 신화의 뼈대를 기반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자신만의 진실을 조직하는 방식이 된다. 따라서 신화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우리가 삶을 구성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기초적 토대이며, 서사의 뼈대 위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동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신화적 서사는 진실을 직접 드러내기보다는, 그 진실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변형되고 확장되는 것이며, 우리는 그 신화 속에서 파레시아적 태도를 통해 자신의 서사를 구축하고, 그 과정 속에서 진실을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즉, 정리하자면, 진실은 서사의 흐름에서 드러나며, 파레시아가 추구하는 진실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서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말한다. 파레시아의 진실 말하기는 결국 주체가 서사를 진행시키기 위한 참여이다. 따라서 파레시아의 진실 말하기는 단순히 발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서사를 구성하기 위한 모든 실천적 노력일 수 있는 것이다. 파레시아의 실천적 태도는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이야기는 그 자체로 성스러우며, 이러한 성스러움은 항상 타인을 유혹하게 된다. 즉, 파레시아라는 것은 자신의 진실 추구-서사의 구성에 타인을 참여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파레시아적 태도를 취한 주체의 이야기에 타인이 포섭될 때, 타인은 필연적으로 파레시아 주체-되기를 행하게 된다. 유혹된 타인은 다시 파레시아가 구성한 서사에 참여함으로써 파레시아 주체를 재구성해낼 수 있는 지평이 되며, 다시 타인은 파레시아의 관점을 이야기 속에서 얻어냄으로써 다시 자신의 서사를 구성해 내며 진실을 추구하는 파레시아가 된다. 이는 파레시아적 태도가 진실되게 이야기를 구성할 때 나타나는 유혹의 순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타인과 현존하면서 파레시아의 유혹과 비-파레시아의 유혹을 구별해내야만 하는 진실 게임에 위치하게 된다. 물론 파레시아와 비-파레시아의 구분은 모호한 것으로, 필연적으로 아포리아를 발생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우리의 내부에서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된 것이며, 진실 게임의 결과는 우리에게 단순히 주어지지 않으며 미스터리 한 형태로 파악될 뿐이다. 인간은 진실 게임에서 진실을 얻을 수 없으며, 단지 진실과 거짓 사이의 진동에서 세계를 파악해 낼 뿐이다. 이러한 진실 게임은 인간의 서사를 진동 속에서 진행시키는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7> 존재와 서사, 파레시아
존재는 서사 속에서 드러난다. 이는 곧 서사의 무게가 존재의 무게를 대변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타자의 존재를 파악할 때, 종종 그들의 서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즉, 어떤 주체가 타자의 서사에 대해 알고 있는지, 혹은 모르고 있는지에 따라 그 존재감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의 존재감이란 단순한 현존이 아니라, 타자의 서사에 대한 앎이 만들어내는 미학적 효과라고 할 수 있다.

현존재는 시대를 드러내는 역사성 속에서 자신만의 서사를 구축하며 개별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러나 한 인간의 서사가 역사성을 비트는 고유한 서사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주체’의 서사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물론, 주체의 서사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맥락에 의해 형성되며, 온전히 주체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 언어 속에서 주체가 일정 부분이라도 그 서사를 ‘소유한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주체가 서사를 소유한다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연속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차이를 형성하고 고유한 이야기로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서사를 소유한 존재는 체화된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행위로 드러내고, 이는 마치 예술 작품처럼 미학적 효과를 발휘하며 타자에게 감각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은, 대중 매체에서 비자연적으로 존재감을 연출할 수 있다는 문제를 낳는다. 앞서 논의한 것처럼, 서사는 실존을 통해 생성될 수도 있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연출됨으로써 생산될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대기업 연예 기획사에서 ‘스타’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이들은 특정한 인물을 대중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존재로 연출하기 위해 각본을 짜고,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그 과정에서 특정한 서사를 기입한다. 이러한 기획된 연출은 벤야민이 언급했던 ‘아우라’와 연결되는데, 스타는 대중적 우상으로서 ‘가짜 아우라’를 부여받고, 이러한 아우라는 대중들에게 강한 미학적 효과를 유발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은 이러한 연출된 서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결국 이데올로기적 기입이란 사실 자체를 망각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항상 타자를 바라볼 때 그 서사가 연출된 것인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진실 게임을 수행하게 된다. 이 서사는 과연 진실한가, 거짓인가? 연출된 것인가, 아니면 실제 삶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보통 사실 관계에 대한 검증을 통해 도출되려 한다. 즉, 서사의 구성 요소가 실재를 반영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허술한 연출은 그 거짓성이 드러나 힘을 잃는다. 그러나 모든 사실 관계가 실제와 일치한다고 해서, 그 서사가 거짓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어떤 사건이 본래 서사를 가질 만큼 거대하지 않았음에도, 특정한 미학적 효과를 위해 강조되고 과장된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인위적이지만 강력한 감각적 효과를 내는 서사로 연출된다면?

이러한 진실 게임의 해답은 단순히 직관적 거부감이나 수용감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호의 속성을 기준으로 고민해본다면, 결국 모든 서사는 어떤 의미에서 ‘연출된 것’이며, 완전한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추구하는 진실성이란 것은 애초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면서도, 끝없이 갈망되는 것이다. 결국, 타자의 존재감이란 그들의 서사 속에서 드러나면서도, 동시에 주체 내부에서 ‘진실성’이라는 개념을 다시 환기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상업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교묘하게 연출된 것이든, 혹은 한 개인이 자신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한 것이든 간에.

그러므로, 나의 논의에서 파레시아가 진실을 추구하는 주체라고 보았을 때, 파레시아적 주체는 존재감의 미학적 효과에 의해 타자의 서사에 유혹되고, 그 진실을 포착하려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주체의 의식 바깥에서 현상하는 타자를 이해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파레시아적 진실 게임을 통해 주체 자신의 진실성을 내부로 환기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파레시아적 주체는 타자의 서사가 지닌 진실성을 파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서사의 가능한 거짓성을 환기시키는 역할도 수행한다. 파레시아적 진실 말하기는 이러한 방식으로 위기를 감수하며 이루어지며, 주체는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의 진실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실존하는 존재가 된다.

<8> 진실된 신화
만약, 우리가 파레시아적 주체-되기를 수행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엇이 거짓되게 연출되고 기획된 신화인지 파악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나의 사상 전반에 깃든 초유의 질문이다. 어떠한 신화를 진실된 신화로 승인할 수 있는지의 문제는 일상적인 것과 학문적인 것을 포괄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진실된 신화란 무엇인가? 내가 파악하기에, 그것은 자기 자신의 허구성을 언어를 통해 드러내야 한다. 이 말은 역설적 진실을 내포하는데, 모든 신화가 신화를 생산한 주체의 진정성과 관계 없이 연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진실된 신화란 연출이란 자기기만적 구조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그것은 서사적 차원에서의 미완결성의 숙명을 항상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러한 숭고한 수용은, 자기 자신이 기만적이라는 것을 언표를 통해 선언하는 것과는 달리, 장치들의 배치를 통해서 신화가 스스로의 허구성을 드러냈음을 표현한다. 그러니 , 우리는 진실성 또한 서사의 운동성을 통한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고, 잠깐의 의미 고정점을 통해서 완결된 원자 이야기들의 선언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이야기가 드러내는 흐름과 그 이야기가 선언하는 것의 의미론적 차이를 판단함으로써 진실성을 갖춘 이야기에 대해 대강이라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 자기 자신은 거짓말을 자주 사용하고 이것에 대해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고 얘기하더라도, 그 사람의 이야기가 드러내는 흐름이 그러한 거짓말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구조를 띄고 있다면, 그 이야기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 있다.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겠다. 어떤 정치적 신화가 스스로를 조작된 것이라고 선언했다고 했으며 그것을 알고 있다고 얘기한다고 해보자.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오히려 자기기만을 감추기 위한 전략적 연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시로, 어떤 개인이 자신은 거짓말을 자주 하지만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고 말한다고 해보자. 하지만 그 사람이 구성하는 이야기의 흐름이 거짓말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면, 우리는 그의 선언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단순한 언어적 선언만을 바탕으로 진실성을 파악하는 것은 다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위험성이 있다.

그러니, 이야기의 흐름이 중요하며, 허구성-서사의 미완결성일 수도 있는-의 폭로에 대한 선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이야기의 흐름이 말하고 있는 것과 관련되어서 파악되어야 한다. 위와 같은 사례에서 보았듯, 우리는 이야기의 서사적 운동성이 선언된 의미와 충돌됨을 포착할 때, 그 이야기의 기만성을 포착할 수 있다. 그러니, 진실된 신화는 단순히 발화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배치되는 방식, 전개되는 흐름, 그리고 그 내부에서 발생하는 균열을 통해서만 감지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논의들은-다소 역설적이고 폭력적인 압축이 있을 수 있음에도-"허구성의 고백이 진실을 드러낸다"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테제가 파레시아스트-되기를 행할 진실을 추적하고 말할 때, 어떠한 이데올로기의 기만적 구조를 파악하는데 용의한 도구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8> 진실 추구
그렇다면, 진실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서사 속의 신화적 장치들의 배치 속에서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현재로 육박해오는 어떠한 시간성, 서사성을 통해 현재 드러나고 있는 진실을 파악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은 미래의 사건이란 장치에 의해 언제든 철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의 자리는 언제나 고정적이고 본질적이지 않으며, 장치들의 배치에 따라 변용될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진실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미래에 바뀌어나갈 수 있는 가능적 진실들을 모두 긍정하면서, 새로운 서사와 장치들의 배치들을 생산하고, 과거의 서사들을 재검토함으로써 현재 나타나는 진실의 우화성을 밝혀내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새로운 진실이 기능할 수 있는 서사적 공간을 마련함과 동시에, 과거의 진실을 새롭게 진실을 구성할 수 있도록 분자적 형태로 폐기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과거의 유령들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애도이며, 이어-쓰기라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소설의 중반부를 읽고, 그 뒤의 내용을 다시 쓴다고 해보자. 아마도, 중반부까지 써내려온 기존 작가의 의도는 부분적으로 폐기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새로운 서사적 전개가 나타나면서, 새로운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서사가 완전한 것처럼 기능할 때, 그것을 절단해서 서사의 후반부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8>
신화는 이야기가 남기고 간 구조이면서도, 기억과 상상력 등으로 느껴지는 미학적 효과이기도 하다. 어떠한 개별적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었을 때, 필연적으로 그 이야기로부터의 감각이 다시 떠오르는 것처럼, 어떠한 이야기는 항상 미학적 효과를 남긴다. 그러한 미학적 효과가 신화적 구조를 연상해내고,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장치로써 기능하는 것이다.

<9> 기호의 의미론과 망각의 역사
1차적인 기호는 경험적 이야기의 배치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파편적 추상들을 종합하는 기계가 있고, 그것은 기호들의 연결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반면, 2차적인 기호는 1차 기호의 이야기 속에서 단순화되고 물질화된 기표들을 새로운 형식의 배치 속에 다시 마주치게 하여 나타난다. 여기에는 이야기를 분해하는 기계가 있다. 이 기계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추상적인 뼈대를 남기고, 그것을 이야기로부터 분리해낸다.

이러한 분해 기계는 다름 아닌 ‘망각’이다. 망각은 단순히 재현의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이야기의 뼈를 구성하는 기호적 작동 그 자체이며, 의미의 재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생성 장치다. 구체적 물질성을 띤 기호들은, 망각을 거치며 추상적인 기호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이야기의 역사이자 동시에 망각의 역사다. 기존의 이야기를 완전히 보존하며, 모순을 극복하면서 나아가는 변증법적 투쟁 서사는 없다. 단지, 지워지고 생성되는 망각의 생성작용이 있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읽어내는 일은 흥미로운 함의를 갖는다. 마르크스의 사유를 ‘망각’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다면, 그것은 기존 서사적 흐름을 단절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해나가는 하나의 감행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한 의도적인 망각을 통해 ‘기억되지 않은 미래’를 당겨오는 전략.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라는 사상을 미래로부터 기억해내기 위해 현재의 구조를 지워낸 것이다.

내가 보기엔, 마르크스가 파악한 핵심은 생산구조 내부의 구체적인 모순이라기보다, 망각되어 구축된 역사와 재현적 역사 간의 대결이다. 이 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론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재정식화해온 흔적들에서 드러난다. 즉, 마르크스주의를 따른다는 것은 단순한 계승이 아니라, 무언가를 잊고 새로운 의미의 장을 구축하려는 실천적 욕망이다. 이 망각의 윤리는 기존의 역사와 대결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현재의 기호들을 다시 배치하려는 시도와 맞닿아 있다.

서사의 변형적 흐름은 어떠한 마주침으로부터 비롯된다. 나의 것이 분명히 아니지만 나의 것 같은 타자와의 만남, 나의 것이라 생각되어지지만 나의 것이 아닌 내부의 타자와의 만남. 이러한 이질적인 마주침과 그 마주침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서사의 변형을 이끌어낸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핵심적 주장인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의식과 사유가 결정된다는 것을 서사적으로 독해한 것에 불과하다.


<10> 사건과 신화

사건이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이끌려 들어가는 순간이다. 사건이 발생함과 동시에, 주체는 매혹되어 신적인 타자의 이야기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동시에 그 이야기로는 설명될 수 없는 자신의 서사 속 균열을 직시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건이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진실이란, 어떠한 서사가 필연적으로 품을 수밖에 없는 불완전함에 대한 지식이다. 그러한 진실은 주체로 하여금, 주체 내부의 여러 이야기들을 흐릿하면서도 명징한 상태로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떠다니는 각각의 이야기들은 처음에는 서로 다른 것처럼 행위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교차하고 중첩되며 하나의 자명한, 또는 자명해 보이는 주체의 서사를 구성해낸다. 그리고 마침내, 주체가 그 이야기 속에 담긴 신화를 파악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타자의 이야기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신화는 주체와 타자 사이, 말과 말 사이, 서사와 서사 사이의 어떠한 실선 위의 어렴풋한 지점에 위치한다. 신화는 타자로부터 솟은 의미이며, 그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단지 현전할 뿐인 의미이다. 그것은 설명되지 않지만 느껴지고, 소유되지 않지만 유혹하며, 가질 수는 없지만 사건 이후의 주체를 조용히 재구성해낸다. 신화는 어렴풋하게 맥락과 구조를 가늠할 수 있게 도우면서도, 절대로 가늠되지 않는 무언가이다. 그것은 미학적 효과를 일으키지만, 명료하지 않다. 신화는 의미가 지연되면서도 발생하는 중심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신화와 성스러움의 기표 X는 위상적으로 혼동될 수 있지만, 나는 그것을 이렇게 구분한다. 성스러움의 기표 X는, 이야기에 ‘있을 것’으로 간주되는 주체의 환상이며, 매혹이 없이도 작동하는 중심이다. 반면, 신화는 이야기의 이면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실재로서, 반드시 매혹을 전제로 한 감응의 구조다. 신화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어렴풋한 형상을 감지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성스러움의 기표 X는 주체가 전혀 매혹되지 않았더라도 의미론적 중심처럼 감지된다. 그러므로 신화는 감응의 실재이며, 성스러운 X는 환상의 지점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와 신화는 어떻게 신화는 어떻게 구분될까? 이데올로기란 어느 순간 너무 익숙해서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다. 그것은 더이상 의심되지 않으며, 설명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과거에 매혹되었던 이야기이며, 그것은 망각된 채 신화로 남아 우리의 인식을 규정짓고 있다.

<11> 칸트와 하이데거의 시간론
칸트는 시간성을 내적 직관의 가능조건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칸트의 시간은 어떠한 변화나 운동의 상태를 감지하도록 하는 주체 내부의 초월적 조건이자 기관이다. 시간은 흐름 자체를 지각하게 해주면서도 그 자체다. 시간은 기표와 기표, 그리고 그것들의 변화의 양상을 어떠한 관계로 엮어주고, 그러한 관계를 통해 가능적인 기표의 자리를 예언한다. 나는 이러한 시간성에 의해 직조된 것을 서사narrative라고 부르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기표들은 특정한 표상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경험적일 뿐 아니라 서사적이다. 서사는 근본 층위에서 경험적 표상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러한 경험적 표상들은 역사적으로 나타나온 이야기들의 효과이다. 우리가 경험하지도 않은 것들에 공감하며 사유할 수 있기에, 이야기는 우리의 경험적 표상들의 어떠한 보편성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여기서의 보편성이라는 것은, 어떠한 상징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해 기표와 기의를 고정점으로 결합시킨다는 뜻을 함의하면서, 인간의 어떠한 일반적 이해가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환기한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언제나 의미적으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기표들의 장치의 표상들이 대개 역사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관점에서, 불완전한 보편성은 실현된다. 이렇게 보면 서사라는 것은 가능적이며 보편성을 함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하이데거가 칸트의 시간을 독해한 방식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간과한 것은, 역사적 지평이라는 극히 모호한 전체성 뿐만 아니라 타자의 이야기의 침입 또한 있다. 하이데거에게 세계란 생성되기보단 단지 지평 속에서 이미 전부 정해져있는, 기호들의 의미망, 이야기들의 집합에 불과한 것이다. 타자적 지평에서 출현한 이야기들의 근간을 이루는 장치들은 기존의 우리가 상상하던 규정적 표상과 상이하며, 우리의 세계 바깥에 있다.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미완결되어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야기의 미래는 기존 기표적 질서들에 따라 예측가능하게 구성된 가능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를 환대하는 장소일 것이다. 이때 프로이트가 말했던 사후작용의 효과처럼, 타자와의 마주침의 순간,기존 규정적 이야기들의 장치들과 그 관계들에 변화가 생기며, 그 이야기는 기존의 것과는 상이한 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러니 이야기는 잠재적인 후광에 둘러쌓여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이야기의 본질적 측면이다. 그러니, 이야기가 향하는 가능적 환상과 잠재성의 위치는 전혀 다른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데올로기는 전자의 효과로 나타나겠지만, 잠재적 차원의 혁명은 가능적 환상의 궤도가 빗겨나가게 한다. 그러니,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씀으로써 이데올로기가 드러내는 신화적 효과를 전복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정치학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일 것이다.
 
<12> 존재하지 않는 진실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서사적 구조 안에 있을 때, 진실이란 언제나 미완의 측면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진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진실이라 간주되는 것’만이 그 구조 속에서 움직인다. 그것은 항상 또 다른 이야기가 제공하는 신화적 인식에 기대어 ‘진실’로 간주될 뿐이다. 진실은 대개 양심과 관련되어 있는데, 여기서 양심이란 주체가 ‘어떠한 이야기’ 속에 위치하는가에 따른 것이다. 이야기를 믿는 것과는 무관하다. 믿음은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을 향한 합리적 경향일 뿐이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대체로 합리성과는 관련이 없다. 그것은 다만 이야기 속에서 작동하며, 우리에게 미학적인 효과를 남긴다. 이 효과는 대개 이야기의 역사성에 기반하고 있다. 나의 글을 계속 읽어온 독자라면, 내가 이러한 문제를 반복해 다루어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떠한 장에서 담론으로 기능하는 이야기는 항상 끼워 넣어질 수 있는 타자의 이야기를 그 잠재성 속에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타자란, 담론에 위치하면서 그것을 변형할 수 있는 주체를 의미한다.) 진실은 이야기 속에서 눈을 뜨고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이야기의 흐름을 추적하면서, 어떠한 장치가 ‘진실이라 간주되는 기표’에 개입했는지, 또 어떤 이야기가 거기에 침투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진실은 언제나 감추어져 있으며, 역설적으로 언제나 그 자리로 보이는 것들을 빼앗아올 수 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의 개입은, 기존에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것들의 신뢰성을 무너뜨리고, 과거에 유지되던 거리감을 파괴한다. 어떤 이야기 사이로 또 다른 진실이 침투할 때, 우리는 진실 게임 하에서 침투하는 것을 대적하는 동시에, 기존에 믿었던 것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이것이 진실 게임의 양상이다. 우리는 도무지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으며, 잠시 새롭게 나타난 사건에 대해 열광하거나 당황하다가, 사태가 진정될 즈음, 심각하게 변형되었지만 우리 안에서 망각을 통해 종합된 이야기들에 다시 익숙해질 뿐이다. ‘진실이라 간주되는 기표’는 언제나 편집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작동한다. 이것은 대중들의 사고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기존 이야기를 신봉하는 자들은, 역설적으로 이러한 편집에 더욱 취약하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세계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담론 내부에서 ‘진실이라 간주되는 것’의 진동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진실은, 오히려 담론 바깥에서 작동하는 이야기들의 감성적 효과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13> 자아

 자아는 자기 표상이다. 칸트의 개념을 빌리자면, "자기 자신"이라는 표상은 외적 질료들과 내적 질료들을 감성을 통해 수용하고, 이를 종합하는 통각, 즉 자기의식에 의해 성립한다. 그러나 이렇게 성립한 자기 자신은 통각이 종합해낸 하나의 대상에 불과하다. 이 대상은 머릿속에 상상적으로 떠오르는 무엇이며, 여러 표상군들을 종합하는 작용을 통해 형성된 개념적 구조물이다. 따라서 자아는 엄밀히 말해 하나의 상상적 표상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다. 우리가 자아를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실체처럼 간주하는 이유도, 자아가 이러한 개념적 구조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적 개념의 밑바탕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표상군들을 시간적 계열로 엮어주는 구조, 즉 통각이 마련하는 하나의 흐름이다. 자아는 이 흐름 위에서 형성된 종합적 개념이다. 그런데 자아가 이러한 개념으로 다루어지는 순간, 자아는 언어적인 것과 접속하게 된다. 여기서 언어적인 것이란, 어떤 이야기, 즉 항상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적 구조를 의미한다.
 
 자아가 언어, 다시 말해 이야기와 접속할 때, 자아는 스스로를 상징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고, 이야기의 미완결성과 공명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나의 완결되어가는 방식으로 축조해나간다. 이는 라캉이 말한 오이디푸스 구조와 상징적 거세를 나의 방식대로 전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 자아는 언어를 통해 이야기와 접속함으로써 신화적 자아로 변형된다. 하이데거가 시간의 가능성에 주목했던 것도, 결국 그의 자아 개념 또한 이야기적 시간 구조와 접속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사유했던 것처럼, 이야기는 언제나 변형과 절단, 균열을 내포하고 있으며, 자아는 이러한 이야기의 운동 속에서 끊임없이 갱신되고 구성된다. 자아란 언제나 이야기와 접속할 때 변화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속은 철저히 수동적이다. 이야기가 자아에 접속하는 것이지, 자아가 이야기를 능동적으로 접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주체의 의지를 통해 어떠한 이야기를 수단처럼 활용하거나 통제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능동성이란, 수영하기 위해 바다 가까이까지 걸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바다의 모든 분자들과 원자들을 능동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지젝이 지적했듯, 현대의 이데올로기는 주체의 능동성을 초자아적 명령으로 강요하며, 우리가 알 수 없는 외부를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입한다. 그러나 새로운 접속은 항상 기존 이야기와 자아의 관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이뤄진다. 현재의 자아가 가능적인 자아의 이야기를 지배하거나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타자적 이야기는 자아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지만, 반드시 강도처럼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자적 침입을 무조건 부정하고 방어하려는 태도는 타인을 항상 강도로 간주하게 만든다. 여기서 나는 파레시아스트의 윤리성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파레시아스트는 다른 주체를 이야기의 몇몇 말들로 유혹하여, 타인의 이야기 속으로 진입할 수 있는 자다. 유혹은 단순한 전략이 아니라, 외부성과의 접속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정치적 필연성이다. 유혹을 통해서만 나의 미완성성과 타인의 미완성성이 마주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미완결성 속에서 결여된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결여는 사실상 새로운 접속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
라캉은 분석가의 윤리에서 유혹자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유혹의 구조를 포착하기보다는 은폐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우리는 수동성 위에 놓인 주체이며, 이야기는 외부로부터 주체 속으로 침투한다. 주체는 단지 수동적으로 이야기될 뿐이다.
 
파레시아스트는 이 진실, 즉 수동성과 외부 접속의 필연성을 아는 자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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