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죽음에 가까웠던 순간이 있을까? 누군가의 죽음, 또는 나의 죽음-이렇게 가까웠던 적이 있던가? 나는 모르겠다. 그토록 경험했던 수많은 자살 충동에서 걸어 나왔던 나이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죽음에 가장 가까이 서있다. 나는 부조리를 보고 있다. 그것은 순수한 균열이자 붕괴이다. 알베르 까뮈, 그가 말했던. 부조리는 환상이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능성에서 시작된다.
순수한 이야기. 우리가 무언가를 거기에-있을-이야기 로 파악하는 것은 의식의 순수한 오판이다. 그러나 세계가 신화 속에서, 자아의 영웅 서사 속에서 스스로를 감출 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환상뿐이며, 환상만이 우리 속에서 재구축될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치사하게도 부조리하다. 진실이 찾아올 때, 현실이라 부르던 환상의 뭉치는 샅샅이 토막 나고 쪼개어진 채 작은 몸통만을 남겨둔다. 그러한 환상의 역겨운 발버둥은 타자의 죽음 직전까지 우리를 끈질기게 지배한다. 그것은, 세계가 멸망하기 직전, 영원할 것이라고 환상을 노래하는 세이렌과도 같다.
왜 우리는 이토록 살고자 발버둥 칠까. 왜 우리는 타자의 죽음에 그토록 예민할까. 그것은 삶 전체가 드러내는 진실인데도, 왜 우리는 기억을 끌어 안아서라도 그들을 보존하려고 할까. 인간은 균열을 견딜 수 없는 생물이다. 죽음 직전, 뇌가 분비하는 엔도르핀은 환상을 긁어모으고, 비록 찰나지만 우리에게 안락을 제공한다. 그러한 입가심은 잠깐의 갈증을 풀어줄 수는 있지만 진실, 또는 존재를 감추지 못한다. 역시 존재는 거기에 있다.
타자의 죽음 이후 타자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고 저기에 존재한다. 우리의 환상 속에서 타자가 남긴 기호들만이 부유할 뿐이다. 데리다는 타자를 타자인 채로 두자고 했다. 어떠한 타자의 타자도 불가능성을 극복할 수 없다. 그래서 무한한 환대, 애도를 펼치기 위해 그대로 두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데리다의 애도는, 종종 숭고하겠지만 그것은 환상에 대한 거부이며 부조리의 보존에 불과하다. 우리는 부조리를 보존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를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그의 존재를 조명한다. 그 말은, 우리가 타자 속에 강렬하게 매혹되는 그 순간이 바로 죽음이라는 말이다. 타자는 종종 나의 환상 속의 기물로 작동하지만, 죽음의 순간이 오면 나는 나를 타자에게 완전히 빼앗긴다. 나의 온몸과 정신이 타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는 비로소 그를 존재로 파악할 수 있다.
내가 진실을 추구한다면, 나는 그의 무한한 타자성을 존중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의 이야기 속에서 들고 나온 뼈로, 그의 신화를 이어 써야 한다. 그의 샅샅이 조각난 파편들을, 그가 아닌 나의 신화 속에서 살아있게 해야 한다. (그는 거짓이며, 내가 그것을 존중할 때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들의 파편이 '되고', 나는 그들을 체험할 것이다. 그들의 생각의 고리를 천천히 따라가면서 느낄 것이다. 나는 그들이 껴안을 수 없는 것들을 껴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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