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철학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사유를 넘어,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의 개념들은 문학, 예술, 정치뿐만 아니라 생명과학과도 긴밀하게 접속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진다. 특히, 그의 철학에서 중심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은 ‘기관 없는 신체(Body without Organs, BwO)’, ‘주름(Fold)’, ‘잠재성(Virtuality)’, 그리고 ‘되기(Becoming)’는 생물학적 개체화 과정과 깊이 연결될 수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의 사유는 단순한 철학적 구성물인가, 아니면 생명과학적 사유와의 유비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인가? 본 논문은 들뢰즈의 철학이 생명과학적 개념들과 어떠한 구조적 유사성을 가지며, 이를 통해 그의 철학적 사유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분석하는 데 목적을 둔다.
2. 기관 없는 신체와 배아발생학
들뢰즈와 가타리(Félix Guattari)는 천 개의 고원(A Thousand Plateaus)에서 ‘기관 없는 신체’를 언급하며, 그것을 ‘모든 규정 가능성을 가지지만 아직 특정한 기관으로 형성되지 않은 상태’로 설명한다. 이는 생명과학에서 배아 발생학(embryology)의 초기 단계와 긴밀한 유비성을 가진다. 배아는 원시적인 세포 덩어리로 존재하며, 특정한 신호와 환경적 요인에 따라 분화되어 기관과 조직을 형성한다.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 개념은 바로 이러한 생명체의 가능성의 장(field of potentiality)으로 기능하며, 아직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상태를 지칭한다. 즉, 기관 없는 신체는 단순한 혼돈 상태가 아니라, 특정한 조건에서 다양한 방향으로 분화될 수 있는 유기적 흐름이다. 이는 배아 발생과정에서 줄기세포가 특정한 세포 유형으로 변이하는 과정과 상응한다.
3. 주름과 유전자 발현
들뢰즈는 주름(Fold) 개념을 통해 실체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며, 이는 주름져 있으나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의 구조를 의미한다. 생명과학에서 DNA는 특정한 환경적 요인에 따라 발현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유전자 발현이란, 특정한 단백질이 필요할 때 DNA의 특정 부분이 활성화되면서 기능적 요소로 변환되는 과정이다. 이는 들뢰즈가 설명하는 주름의 작동 방식과 유사하다. 즉, 유전자는 생물학적 정보가 접혀 있는 상태이며, 특정한 계기로 인해 그것이 펼쳐지면서 구체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름 개념은 유전 정보의 발현 과정과 유비적 관계를 형성한다.
들뢰즈의 ‘주름’은 또한 생명체의 형성과정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이기도 하다. 배아의 발생 과정에서 신경계, 심혈관계 등이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되는 것은 생물학적 주름의 전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들뢰즈의 주름 개념은 단순한 형이상학적 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학적 생성 과정과도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4. 감응(Affect)과 신경망의 가소성
들뢰즈는 감응(affect)을 ‘신체가 경험하는 외부 자극에 대한 변이적 반응’으로 정의한다. 이는 감각적 지각이나 정서적 반응을 넘어서, 신체가 외부 세계와 접속하면서 형성하는 역동적 상태이다. 현대 신경과학에서 신경망의 가소성(neural plasticity)은 특정한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신경회로가 변형되는 과정으로 설명된다. 즉, 신경계는 외부 자극에 따라 스스로 재구성될 수 있으며, 이는 감응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들뢰즈가 ‘되기(becoming)’에서 언급하는 ‘비인간적인 것으로의 생성’ 또한 특정한 환경과 접속함으로써 신체와 정신이 변화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감응의 개념은 단순한 심리적 경험이 아니라, 신경계의 작동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생물학적 변형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다.
5. 되기와 생물학적 개체화
생명과학에서 개체화(individuation)는 단순한 유전적 결정론이 아니라, 환경과의 지속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한다. 들뢰즈의 ‘되기(becoming)’ 개념도 정적인 개체가 아니라, 관계적 변이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주체를 강조한다. 즉, 개체는 미리 결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외부 요인과의 접속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형되는 존재이다. 이는 생명과학적 개체화 과정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한다.
6. 결론: 들뢰즈의 철학은 생명과학적 모델을 사유의 도구로 활용한 것인가?
들뢰즈의 개념들은 단순한 형이상학적 사변이 아니라, 생명과학적 모델과 긴밀한 유비성을 가진다. 그의 철학이 생명과학적 개념을 직접적으로 차용한 것인지, 혹은 단순한 사유적 유비 관계인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논의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의 ‘기관 없는 신체’는 배아 발생학과 연결될 수 있으며, ‘주름’은 유전자 발현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또한 ‘감응’은 신경망의 가소성과 유사한 원리로 작동하며, ‘되기’는 생물학적 개체화 과정과 긴밀히 연결된다.
이를 종합해보면, 들뢰즈는 철학적 개념을 단순히 추상적인 형이상학의 문제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생명과학적 과정들을 사유의 재료로 삼아 새로운 철학적 개념을 구성해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생명과학적 모델과의 유비성을 통해 보다 실질적인 생성의 논리를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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