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론의 거부와 언어적 주체의 형이상학>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나는 나의 세계이다”라는 명제는 자주 유아론적 혹은 심리학적 주장으로 오해되지만, 실제로 이 명제는 철저히 인식론적이며, 언어-논리 구조 안에서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드러내는 자기지시적 선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실재론자가 아니었다. 실재론자였다면, 그는 자아를 세계 안의 구성 요소 중 하나로 간주했을 것이며, 세계는 자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독립적 실체의 총합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게 세계란 존재론적 실체의 집합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배열 가능한 사태들의 총체이며, 이 배열 가능성은 언표 가능성이라는 논리적 구조에 따라 결정된다. 세계는 오성적 구성 규칙, 다시 말해 논리 형식에 따라 드러나는 대상들의 장이며, 명제는 그 구조를 논리적으로 반영하는 언어적 형식이다. 이때 자아란 세계 속의 한 요소가 아니라, 바로 그 세계의 경계를 긋는 형식, 곧 말할 수 있는 것의 조건이자 언어 구조의 한계선이다. “나는 나의 세계이다”는 문장은 바로 이 논리적 자각의 형식적 진술이다. 자아는 자신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지만, 자아의 구조가 그 자체로 세계의 구조를 구성한다는 것을 ‘의미의 경계’라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인식론은 심리학이다”라고 선언하며, 감각·의식·자아를 중심으로 구성된 고전적 인식론을 철저히 비판한다. 그는 자아의 심리적 내용이 아니라, 언어가 세계를 어떻게 의미화하는지를 묻는다. 그에게 자아는 세계의 경계이며, 세계는 말할 수 있는 것들의 총체이기에, 자아는 말할 수 있는 것의 조건이자 논리적 한계로만 존재한다. 이 구조는 결국 칸트의 초월적 통각과 유사한 위치에 자아를 두되, 형이상학적 선언 없이 언표 구조 속에서 그 위상을 유지하게 만든다. 그러나 칸트가 실천이성의 영역에서 초월적 자아의 윤리적 확언을 시도한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그 자아가 가닿지 못하는 윤리, 곧 침묵을 요청한다. 자아는 말할 수 없지만, 그로 인해 말할 수 있는 것의 구조는 드러난다. 이 침묵은 단순한 포기나 미지의 존중이 아니라, 언어의 형식이 도달한 자리에서 윤리가 개입하는 방식이다.
결론적으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나는 나의 세계이다”라는 명제는 유아주의적 주장이 아니라, 세계를 언어로 구성하고 있는 인식론적 주체가 자신을 형식적으로 반사한 고밀도의 철학적 자기지시다. 그것은 실체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세계의 구조를 명료하게 긋는 진술이며, 존재를 실체로 파악하지 않고 형식으로 사유한 자만이 남길 수 있는 문장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재론적 존재자에서 벗어난 자가, 오직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고자 했을 때 도달하는 마지막 윤리적 진술이다.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칸트 시간의 구분 (0) | 2025.06.03 |
---|---|
여성담론연구 (0) | 2025.05.29 |
전기 비트겐슈타인과 칸트 (0) | 2025.05.27 |
비트겐슈타인과 불립문자적 진실 (0) | 2025.05.27 |
의식 (0) | 2025.05.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