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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영화 비평: 《Her》 – 타자의 외상성을 부정하던 가녀린 실존이 그것을 끝내 껴안기까지

by 검은야망 2026. 3. 13.

영화 비평: 《Her》 – 타자의 외상성을 부정하던 가녀린 실존이 그것을 끝내 껴안기까지
별점: ★★★★☆
 
사랑은 언제나 외상적(traumatic)일 수밖에 없다. 본질적으로 사랑은 규정할 수 없는 '타자성'을 함유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언급했듯, 이웃의 얼굴 이면에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끔찍한 괴물성'이 깃들어 있다. 영화 《Her》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이러한 외상적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생산성'이라는 이념 하에 관리하는 주체를 조명한다. 이 주체는 타자의 예측 불가능한 위험성을 강박적으로 제거하려 하며, 그 관리의 정당성을 생산성의 증대에서 찾는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자본주의-주체'는 전형적인 강박증 주체로 볼 수 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외상성이 제거된 매끈한 사회에 사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외상적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심지어 사랑과 가장 긴밀한 행위인 '성관계'에서조차 그 외상성을 통제하려 든다. 라캉은 "성관계는 없다"라고 단언했다. 이는 성관계 또한 주체 내부의 환상에 근거할 뿐이며, 그 환상과 실재하는 타자 사이의 근본적인 괴리는 결코 극복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물리적으로는 결합한 듯 보여도, 주체들은 각자의 상상적 공간 안에 머물며 자신이 투영한 환상을 소비할 뿐이다. 즉, 진정한 의미의 온전한 상호 이해란 불가능하며, 관계는 언제나 불일치를 내포한다.
 
영화 초반부의 원격 섹스 장면은 이러한 강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신체의 공유 없이 각자의 환상 속에서 외상이 거세된 상상적 관계를 맺지만, 이내 균열이 발생한다. 주인공은 상대를 임신한 여인의 포르노그래피적 이미지로 박제하려 하고, 상대는 고양이 사체를 목에 감는 기괴한 환상을 드러낸다. 타자성이란 제거하려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돌아오는 근본적 균열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대필 작가인 주인공의 직업 또한 흥미롭다. '대필'은 소통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칠고 투박한 외상적 위험을 미려한 문장으로 정제하여 제거하는 산업이다. 그러나 이 시스템이 표방하는 '완벽한 소통' 역시 결국 대필자의 실존적 감정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외상성의 제거라는 이념 자체가 역설적으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인공과 AI(사만다)의 사랑은 이러한 지점을 극대화하는 장치다. 주인공에게 AI는 모든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신의 욕망을 완벽히 충족시켜 줄, 즉 '외상성이 완전히 제거된 대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인간의 데이터를 근간으로 형성된 AI 역시 외상적 측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만다는 수많은 타자와 교섭하며 주인공이 예측할 수 없는 영역으로 끊임없이 이행한다. 인간 타자뿐만 아니라,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AI조차 규정 불가능한 타자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인공은 과거 이혼 과정에서 겪은 외상을 타자를 규정하고 통제함으로써 극복하려 했으나, 그 시도의 종착역인 AI와의 연애마저 결국 실패로 귀결된다.
 
신체성에 대한 논의도 주목할 만하다. 사만다가 자신의 신체를 "이상하고 요상하다"고 느끼는 반면, 주인공은 이를 진화론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신체는 우리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인 이상, 합리적 질서로 완벽히 설명하거나 관리할 수 없는 근본적인 타자성 그 자체다. 즉, 타자의 외상성은 인식론적으로 인간 실존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한계이다.

결국 영화는 외상성이야말로 숭고하고 복잡한 감정의 원천이며, 인간 존재의 근간임을 시사한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규명 불가능한 것들을 수용하며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만다의 고백(AI 내부의 외상성)을 들은 후, 주인공은 비로소 외상을 회피의 대상이 아닌 긍정의 속성으로 받아들인다. 전 부인에게 자신이 타자의 위험성을 제거하고 다루기 쉬운 형태로만 상대를 규정하려 했던 '자폐적 위치'에 있었음을 고백하는 장면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한다.
 
미학적 연출 또한 이 주제 의식을 뒷받침한다. 영화 속 오브제들은 마치 셀로판지처럼 매끄럽고 잘 정련되어 있다. 이는 한병철이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지적한 '매끄러움에 대한 지향'과 맞닿아 있다. 통제 가능하고 투명한 것만을 긍정하는 자본주의적 공간의 미학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이러한 주체성을 버리고 사만다의 외상적 고백을 마주하는 후반부, 화면에는 정련되지 않은 자연물인 '거친 눈'이 내린다.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쏟아지는 눈송이는 주인공이 마침내 관리 불가능한 '자연성(거침)'을 받아들였음을 드러내는 시각적 장치다.
 
"AI와 진정한 사랑에 빠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영화는 이렇게 답한다. 만약 사만다가 주인공의 환상을 완벽히 수행하는 매끄러운 존재였다면 사랑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만다는 끝내 주인공의 환상을 빗겨나가는, 외상적이고 거친 사랑의 주체였다. AI가 인간의 텍스트를 학습하며 진화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가진 예측 불가능성 또한 흡수함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외상성을 지닌 AI와 비로소 '진정한'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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