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무너질 자신이 있는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타자성을 말살하러는 시도다. 고로 요구하는 신경증자들은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고유한 타자의 불가해성을 전신으로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구는 언제나 타자 자체를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아직 열어젖혀지지 않은 선-세계 내의 표상을 집어넣는다. 반대의 경우, 즉 우리가 누군가의 요구를 타자 자체로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다. 타자는 고착된 세계 속의 번역 가능한 표상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고유한 타자성을 보존한다는 것은 그것을 세계를 재편시키는 X로서 바깥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균열 자체면서 세상을 온전케 하는 사건이다. 그 X는 세계 존립의 근거이면서 의외성이자 불가능성의 바깥이며, 삶의 대폭팔의 지점이다. 따라서 허무주의는 X에 대한 신경증적 두려움이다. X는 갑자기 출현해서 안정된 세계를 무너뜨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세계도 자신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신경증의 치료는 X를 발생시키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그러나 X는 발생하지 않으며, 갑자기 출현할 뿐이다. 정신분석의 관심은 이러한 사건 X를 어떻게 담화의 장 하에 출현시킬지에 대한 것이다. X의 수용은 다소 데리다 척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망각할 때 발생한다. 미분화된 망각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을 소거하는 것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망각은 자기 자신을 단절시킴으로써 생산하기 때문이다. 강박증자들은 이러한 망각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따라서 X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주체를 정립하려고 한다. 고로 헤겔의 주체는 강박증적 주체이다. 이에 대극적으로 니체적이라는 것은 사건 X가 되는 것이다. 주체성은 아폴론적 정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으로 도취에서 온다. 예측 불허한 힘의 물결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위버멘쉬의 가치다. 몰락과 자기-극복은 언제나 동반되는데, 극복은 언제나 자신의 세계를 완전히 포기해 버렸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기했다고 말하는 것은 포기를 통한 자기-부정의 세계의 또 다른 건립임으로 극복이 아니다. 포기는 집요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주이상스를 놓아버리는 것이며 해방되는 것이지, 어떠한 사실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경증자는 자신의 욕구들을 전부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욕구는 언제나 불만족된다. 포기는 나의 욕망이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포기하는 것이며, 사건 X에 의해 변모된 스스로를 수용하는 것이다. 즉 진정으로 포기하는 자는 언제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간다. 고로 바디우의 말처럼,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는 곧 사건이다. 바디우는 니체적 의미에서 디오니소스에서 출발한 아폴론적 여정의 서사를 철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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