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시간론은 칸트의 시간 개념을 전유하면서, 그 해상도를 낮추는 방식으로 전환시킨 결과물이다. 칸트에게 시간은 개별적 직관의 선험적 형식이며, 각 표상들의 내포적 질료들이 관계 맺는 순수한 직관의 장으로서 작동한다. 이 개별적 시간은 주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직관의 질서로 포착되며, 표상들의 계열과 정합 속에서 주어진다. 그러나 이 시간성은 동시에 보편적 동일성의 체계 안에서, 다시 말해 초월적 통각 X의 통일성 아래 구성된다. 주체는 자신의 다양한 표상들을 하나의 자아 아래 포섭하지만, 이 통각의 구조 자체는 주체의 안과 밖, 혹은 경험과 선험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리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통각은 표상들의 통일을 가능케 하는 내적 능력처럼 작용하지만, 그 기능은 결코 직관될 수 없으며 항상 구조적 조건으로만 주어진다. 그래서 통각은 주체 내부에 존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든 표상 이전에 작동하는 사유의 바깥으로 밀려나 있다. 이러한 이중성은 시간 개념에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시간은 직관되는 질료들의 질서이면서도, 그 질서를 동일화시키는 통일성의 외적 구조에 종속된다.
하이데거는 이 균열을 주체의 시간성 전체를 재조정함으로써 대응했다. 그는 개별적 시간과 보편적 시간을 분리하지 않고, 오히려 현존재의 시간적 구조 안에서 하나로 통일해낸다. 더 이상 주체는 자폐적으로 폐쇄된 인식 주체가 아니며, 대신 세계-내-존재로서 역사적 지평 안에 던져진 실존이 된다. 시간은 주체의 내면 구조가 아니라, 존재자와 존재자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 벌어지는 ‘의미의 개시’ 그 자체가 된다.
이러한 변환은 범주의 위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칸트에게 범주는 오성의 형식으로 주어지며, 경험을 선험적으로 구성하는 능력으로 주체 내부에 놓인다. 하지만 하이데거에게 범주는 더 이상 형식적 개념이 아니라, 현존재가 속한 공동체와 역사적 지평 속에서 구성되는 실존적 의미 구조이다. 다시 말해, 범주는 공유되는 세계, 곧 이데올로기적 의미망 위에서 작동하는 실천적 존재 방식으로 재위치화된다. 범주가 오성에 붙박혀 있는 고정된 틀이 아니라, 현존재의 이해가능성의 장에서 끊임없이 재배치되는 유동적 지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전회는 곧 물자체의 위치를 인식론적 한계가 아니라 존재론적 지반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물자체는 더 이상 도달 불가능한 외부가 아니라, 존재자들 간의 관계를 매개하며 배후에서 의미를 미끄러지게 만드는 대지로 작동한다. 그 결과, 칸트에서 자폐적으로 닫혀 있던 인식 구조는 하이데거에게 이르러 지평화되고, 구조적 탈출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 과정은 분명히 헤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동일성의 내파, 개념의 지양, 그리고 절대적 사유의 외화 과정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론적 전회가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 하나가 남는다. 바로 객관성이라는 문제다. 칸트는 개념이 주관적 자폐성 안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통용되는 ‘합의 가능성’이라는 형식으로 객관성을 논증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합의의 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성의 개념은 자폐적인 작용일 뿐, 그것이 어떻게 타자와의 합의 구조를 이끌어내는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나는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면서, 이 객관성 논증이 인상적이면서도 모종의 착시를 일으킨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이 문제는 하이데거나 비트겐슈타인이 아니라, 라캉에 이르러 구조적으로 조명된다.
라캉은 오성의 자리를 상징계로 이행시킨다. 상징계는 객관적 구조의 자리를 대체하는데, 여기서 ‘객관’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그렇게 간주하는 상징적 위치로서만 존재한다. 주체는 상징계 안에서 객관이라 믿어지는 구조, 즉 지식을 가진 대타자를 가정하고 그에 따라 표상을 정합화한다. 이때 상징계는 항상 주체 바깥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주체의 모든 판단과 표상을 규율하는 내부 질서로 작동한다. 오성은 더 이상 진리의 수호자가 아니며, 기표의 체계 속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환상적 매개물로 전락한다. 결국 객관성은 실재하지 않고, “객관이라 간주되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전제로서만 기능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칸트의 통각, 하이데거의 지평, 라캉의 상징계는 서로 다른 철학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객관성의 구조’를 배치하기 위한 기계적 장치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배치는 항상 주체 바깥의 어떤 위치를 구성하지만, 동시에 그 바깥은 주체의 내면을 구성하는 형식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통각은 주체 밖에 있으면서도 주체 안에 있고, 상징계는 주체 위에 있으면서도 주체 내부에서 작동한다. 이 이중적 위상 속에서만 철학은 인식의 가능성을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이 철학이 말하는 객관성의 진정한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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