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인식론적 구조 속에서 주체의 자기 인식은 언제나 형상화된 표상들을 통해 구성된다. 우리가 자아를 인식할 때 사용하는 모든 질료들은 선험적으로 종합된 표상이며, 그 표상은 오성에 의한 형식적 규정성을 갖는다. 이 표상은 감각이 아니라 직관과 개념의 종합을 통해 구성되며, 결국 자기 인식은 오성적이고 지성적인 차원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때 직관의 선험적 형식으로서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오성의 범주는 개념의 객관성을 보장하지만, 실재의 감각적 강도는 이 구조 속에서 포섭되지 않는다.
라캉의 상징계 역시 이 구조를 언어적 층위로 변환한 것이다. 주체는 상징계 내에서 자기를 이해하고자 시도하며, 이때 상징계는 마치 객관적 질서를 보장하는 대타자의 구조로 작동한다. 그러나 이 상징계 또한 철저히 오성적 구조의 반복이며, 기표의 배열과 차연을 통해 의미를 구성한다. 라캉은 기표의 물질성을 강조하지만, 이 물질성은 실재적 감각이 아니라 언어적 강제의 힘, 즉 기호의 구조적 작용으로 이해해야 한다. 결국 라캉은 욕망과 자기 인식의 구조 자체가 상징계 내부에서만 성립 가능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는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조차 오성의 작용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칸트는 실재의 강도는 결코 형상화될 수 없으며, 다만 양적 정도로만 표상 가능하다고 보았다. 강도는 감각으로 주어지되, 그것은 표상되지 않으며, 오로지 의식에 주어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것’으로 머무른다. 마찬가지로 라캉의 실재계 또한 어떤 직접적 지각이 아니라, 오직 상징계로부터 미끄러지고 실패함으로써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이때 실재는 감각적으로 느껴지지만 형상화되지 않으며, 기표의 틈새에서만 그 잔존을 드러내는 일종의 강도적 충격으로서 작용한다.
요컨대, 칸트와 라캉 모두에서 실재는 결코 인식될 수 없고, 주체는 오직 형상화된 표상, 즉 언어적 또는 개념적 구조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과 세계를 조망할 수 있다. 자기 인식, 자기 이해, 자기 욕망에 대한 모든 사유는 결국 표상 불능성을 내포한 지성적 구조의 한계 위에서만 성립 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재는 인식 구조의 바깥에 존재하지만, 그 바깥은 언제나 인식의 중심을 구조화하는 기표적 공백으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바로 그 공백 위에서, 우리는 오성의 한계를 자각하고, 욕망의 구조가 어떻게 상징계 내부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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