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이란 무엇인가? 유혹은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만약 그 목적이 사랑의 성취라면, 유혹은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행해지는 모든 수단적인 절차가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유혹은 언제나 논리적으로 사랑의 성취 이전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랑의 성취란 무엇일까? 어떠한 사랑이 일방적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즉, 사랑의 성취는 사랑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상호적인 사랑을 전제한다. 또 무엇이 있을까? 서로 사랑하지만, 서로가 그 사실을 알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즉, 사랑의 성취는 상대방이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가능한 것이다. 일단, 우리는 사랑의 성취라는 것이 이 두 가지 요건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 많은 요건이 존재할 수 있지만, 논의 영역을 보다 더 제한해서 탐구하기 위해, 이 두가지 요건과 사랑의 성취는 필요충분조건의 관계에 있다고 가정하겠다. 이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유혹은 이 두가지 요건의 성립을 위해 달려나가야만 한다.
유혹은 어떻게 첫 번째 요건을 달성할 수 있을까? 사랑에 참여하는 이가 단 둘뿐이라고 전제해보자. 이 전제 하에서는, 나와 상대방만이 사랑에 참여한다. 상호성의 한 축을 내가 달성하기 위해, 나는 상대방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도록 해야 첫 번째 조건이 달성된다. 물론,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그 상대방을 후에 사랑하는 것 또한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유혹의 주체가 만약 나라면, 피유혹자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라면, 언제나 내가 먼저 상대방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상대방에 대해 충분히 알고, 그것이 나의 기호에 맞을 때 나는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이 질문이 참이라면, 우리는 결코 처음 보는 상대으로부터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처음 보는 상대로부터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사랑은 그 사람을 충분히 아는 것과 큰 관계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미지의 상대에 우리가 종종 이끌리는 경향성을 보았을 때, 사랑은 모르는 것과 더 큰 관계가 있다. 이렇게 봤을 때, 나는 상대방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모든 모르는 이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조금 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사랑한다. 여기서, ‘조금 더’ 알고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가보자.
우리는 일상언어적으로, 어떤 사람을 안다고 쉽게 말한다. 예컨대, 우리는 ‘원빈’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원빈은 잘생겼고,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원빈이라는 사람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즉, 여기서 ‘안다’라는 맥락은, 그 타인이 존재로서 현상했다는 의미에 가깝다. 우리의 세계에, 원빈이라는 배우가 문을 열고 나타날 때, 우리는 그를 ‘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앞선 사랑의 맥락에서 다시 정리해보면, 우리는 존재로서 현상한 이만을 사랑할 수 있다. 이때의 존재로서 현상했다는 의미는, 우리가 그에게 충분히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그 존재가 스스로의 존재감을 충분히 발휘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존재로서 현상한 이를, 우리는 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들을 알 수 없지만 드러난 ‘무언가’로 파악한다. 그렇게 보았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알 수 없지만 드러난 무언가를 사랑한다. 이러한 측면은, 유혹, 즉 타인이 나를 사랑케 하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타인이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는 타인에게 있어 알 수 없지만 ‘돌출된 무언가’여야 하는 것이다. 타인에 시선 하에서, 나는 돌출되어 있지만 은폐되어 있어야 한다. 이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연출이다. 연출은 단지 돌출시킬 뿐만 아니라, 언제나 돌출되지 않은 몫을 챙겨놓는다. 이 몫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단지, 타인이 그 남겨둔 몫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사랑은 서로의 알 수 없는 몫에 관심을 가지면서 점차 실현된다. 사랑은, 텅 비어있는 타인의 여백에,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으로 실현되어 간다. 그것은 타인이 나에게 남겨둔 알 수 없는 몫을 탐색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몫이 단순히, 유혹이라는 영화의 결말부인 사랑으로 다가가기 위한 맥거핀임이 밝혀진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유혹은 단지 상처뿐인 거짓된 사랑의 표상으로 남게 될 것이다. 유혹은 사랑의 성취에 실패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깊게 고민해 보았을 때, 유혹은 언제나 진실성의 문제와 결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유혹이 실현되려면, 단지 돌출되지 않은 몫을 챙겨둘 뿐만 아니라, 그 몫이 진실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끝까지 그 몫에 대해서 상대에게 침묵하는 것이 유혹의 본질인 것일까? 그러한 침묵이 영구히 지속될 수 있는 것이라면, 유혹에 있어서 긍정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침묵 속에 단 하나의 진실도 없다면, 우리는 상대방이 캐묻는 질문들에, 침묵할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처럼 유혹이라는 포커 게임에서 블러핑은 단기적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있어도, 장기적 목표 달성의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거짓되면서 침묵하는 유혹이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유혹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진실되면서 침묵하는 유혹의 양태를 탐색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침묵의 이유가 그것이 거짓이며 사랑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어서는 안된다. 침묵의 이유가, 그 몫의 진실성이 의심되기 때문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진실하다는 사실이 나에게 분명하지만, 그것을 말하려고 해도 말하기 어렵거나 타인에게 이해되기 어려운 무언가가 그 몫이어야 할 것이다. 말하려고 해도 쉽게 말해질 수 없거나, 이해시키려 해도 쉽게 이해시킬 수 없는 무언가. 그것은 진실한 비밀이며, 숭고한 비밀이다. 이러한 것들은 사랑의 실현 동력이 멈추지 않도록 하는 진정한 유혹의 요소가 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유혹은 결코 단순한 과정이 아니다. 유혹은 자신의 비밀을 만들고, 그것을 타인에게 존재감의 형태로 잘 드러내는 연출이기 때문이다. 비밀을 만드는 과정에서, 유혹자는 필연적으로 타자에게 유혹되어야 한다. 그 타자는 어떠한 것일 필요는 없지만, 나를 매혹시켜 스스로의 내면에 비밀을 잉태시키기에 충분해야 한다. 즉, 진정한 유혹자는 언제나 피유혹자의 위치에 자기 자신을 위치시킨다. 이 유혹은 특정한 타자, 특정한 피유혹자를 위한 분별 전략이 아니다. 진정한 유혹은 타인으로 하여금 존재론적 후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진정한 유혹자의 유혹은, 무분별한 타자를 대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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