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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믿음 철학

by 검은야망 2023. 8. 18.

*믿음과 의지의 작용
모든 잠재적 믿음들은 선험적으로 존재한다. 잠재적 믿음들 사이에는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 이 잠재적 믿음들은 삶의 가능성,지평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인간은 믿음의 불씨들을 하나씩 확장시켜 나간다. 이 지평은 스펀지 판에 비유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믿음 확장에의 의지를 발휘하는 존재로써, 탄생 즉시 스펀지판에 의지라는 물을 떨어뜨린다. 그 믿음 확장에의 의지는 끊임없이 믿음들을 확장시켜 나가려고 한다. 그러한 믿음의 확장은 변증법적 과정으로 이뤄진다. 근거 믿음들-이미 불을 킨, 또는 적신-들의 변증법적 작용은 새로운 결론 믿음을 적셔놓는다. 여기서 인간의 경험은 믿음의 지평에서 믿음을 확장시키는데 기여한다. 단순 경험만으로도 믿음은 확장된다. 이 믿음 확장에 근거는 믿음 확장에의 의지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과 대립되는 경험을 하는 경우에 이성의 변증법적 작용은 개별 믿음들의 양적 정도를 조절하고-다른 새로운 믿음에 불을 킬 수 있게 돕는다. (믿음들의 지평에는 질적 차이가 존재하지만 믿음의 지평 위 의지의 흐름에서는 양적 차이만이 존재한다.) 여기서 언어와 문자는 경험의 대리인으로써 기능한다. 언어와 문자는 적시지 못한 지평을 제시함으로써 이성의 변증법적 작용을 원활하게 돕는다. 그러나 언어는 스펀지판의 세부적 믿음들을 고려하지 못하고, 너무 개념적이므로 오히려 언어가 제시하는 공통영역에 의지를 가둠으로써 믿음 확장을 제한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언어는 인간 일반의 소통 매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온전한 경험을 인간 일반으로 한정하여 편집하여 타자에게 전달된다. 따라서 인간은 언어에 귀속될 수록 '인간 일반의 절대성'을 탐닉하게 되며, 이러한 언어의 함정은 선대 철학자들을 '절대적 진리 추구의 함정'으로 빠뜨렸다.

다시 믿음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확장된 믿음들의 총체는 인간의 자아를 형성한다. 이러한 자아는 의지에 적셔진 믿음들 자체라는 이유로, 의지의 인식을 가능케 한다. 의지가 믿음을 적시고 믿음은 의지에 의해 적셔짐으로써 의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지의 확장은 자아에게 변증법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렇게 매 순간 인식된 의지는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은 의지의 변증법적 작용을 인식하며, 그렇게 인식된 확장을 이성의 작용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인간은 의지에 의해 인식된 확장인 이성이 자신의 사고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성은 의식에 의해 인식된 확장으로써 의지의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가 이성을 스스로의 전부라고 느낄 때, 의지는 폭력으로 변모한다. 우리는 철저히 의지의 노예가 된다. 그런 생각은 우리가 의지의 노예로써 철저히 필연적 삶을 살 뿐이라는 주체성 상실의 고통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즉 확장에의 의지이다. 우리는 이성이 아니라 확장에의 의지를 나로써 끌어안아야 한다. 오직 그럴 때, 우리는 믿음 확장에의 의지를 발휘하여 믿음을 확장하는 존재로써 다시 주체성을 회복하게 된다.

다시 스펀지판 비유를 더욱 섬세하게 해보겠다. 우리는 믿음 스펀지판에 의지를 흘린다. 의지는 믿음들에 흡수되어 믿음의 습도를 결정하고 그 의지들은 뭉치기도, 흩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지들의 운동은 '얼룩'을 만든다. 각 개인들간의 얼룩의 공통 영역은-의지를 발휘하는 존재라는 공통분모에 의하여-존재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러한 공통 영역이 우리가 말하는 '인간 일반'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언어는 이러한 얼룩의 공통영역을 전제하고 이뤄지는 '소통의 매개'라고 볼 수 있다. 즉 언어는 인간 일반을 전제한다. 이러한 점에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을 비판할 수 있는데, 윤리는 인간 일반을 전제하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서 논해질 수 있는 것이다. 윤리가 보편성을 상실할 때, 윤리는 윤리가 아니게 된다.

*언어
언어는 사유자로부터 믿음이 외화된 것이다. 복합적 믿음은 일반적 영역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표상적이다. 언어는 반면 믿음과 대비되게 일반적이다. 이렇게 믿음이 외화되어 언어의 형태로 나타남으로써, 복합적 믿음 중 인간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믿음 영역만 제시되어 손실을 발생시킨다. 믿음의 외화인 언어는 기존 복합믿음의 완전한 반영은 불가능하지만,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따라서 외화된 언어는 사유의 대리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대리인은 일반적 영역에서 경험을 제시하는데, 이러한 경험은 내화될 수 있다. 여기서 내화란, 언어 수용자의 믿음들을 바탕으로 의지를 발휘하여 언어를 표상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표상은 기존 수용자의 근거 믿음들과 제시된 언어로써 주어진 믿음들의 신뢰도, 즉 양적 변동을 발생시킬 수 있다. 양적 변동은 제시된 언어 제시자의 신뢰성에 대한 기반 믿음이나 언어 자체에 대한 믿음들에 의해 영향 받는다. 따라서 내화를 거치더라도 양적 변동 없이 언어가 표상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멈출 수도 있다. 여기서 언어는 내화되어 수용자에게 영향을 주고, 다시 영향에 의해 믿음들을 재구성하여 다시 외화한 후 다시 내화되며, 외부에 언어가 지속적으로 축적되도록 한다.

내화,외화의 연속으로 언어가 축적되면서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믿음의 표면적은 계속 크고 작게 변화하였다. 문헌학은 이러한 언어의 축적 양상을 보여, 당시 시대의 일반적 믿음이 현재의 믿음까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나타낸다. 문헌학은 언어의 축적양상을 추적해나가는 것이다. 축적된 언어는 담론을 형성하며,  이러한 담론은 믿음 일반[일반적 얼룩]을 형성하여 개별자들에게 영향을 준다. 담론은 믿음과 언어의 내화와 외화에서, 축적된 언어가 가지는 힘을 보여준다. 이러한 담론은 언어적이므로 일반화되어있으며, 담론의 영향을 받은 자와 담론의 영향을 받지 못한 자를 구분하게 한다. 여기서 담론에 영향을 받은 일반자는 담론의 영향을 받지 못한 자를 배제하거나 담론의 영향을 받을 것을 강요하는 폭력,즉 획일화를 강행한다. 이는 담론의 지배가 야기한 개인 지배가 다른 개인을 지배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푸코는 축적된 언어, 즉 담론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윤리
인간이 만든 믿음의 총체는 자아를 형성한다. 자아는 "얼룩" 자체이다. 여기서 언어는 인간 믿음의 지평에서 일반적 영역을 넓히는데 기여한다. 인간은 모두 의지를 발휘하는 존재로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여기에 언어의 영향이 더해지면 개인간의 공통 영역이 나타나게 된다. 윤리는 이러한 공통 영역 내에 존재한다.

반면 도덕은 개개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판단을 함축하는데, 이는 개인이 확장시킨 믿음들로부터 비롯된다. 도덕은 단 하나의 믿음이 아니며, 여러 복합적 믿음들이 얽혀서 생성된 것이다. 이러한 도덕은 반드시 명시적이지 않으며, 암묵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공통 영역을 넘어선 믿음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합적 믿음들의 얽힘, 즉 도덕은 마치 암묵적 법칙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이 법칙은 개별자에게 선과 악을 부여한다. 법칙을 지키면 선, 지키지 않으면 악인 것이다. 이렇게 선과 악은 개별자 내부에 있게 된다. 이러한 선과 악은 도덕이 자아에 부과하는 무게 때문에 발생하는데, 도덕은 복합적 믿음의 얽힘으로 구성되어 자아를 지배한다.

윤리란 다시 말하자면, 도덕의 공통영역이다. 앞서 의지를 발휘하는 존재라는 점과 언어의 영향으로 나타나는 공통 영역이 윤리인 것이다. 이러한 공통 영역은 인간 일반을 나타내며, 언어로써 표현될 수 있다. 이렇게 표현된 윤리는 다시 개별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개별자의 도덕에 더 일반성을 띄게 만든다. 이렇게 윤리와 도덕은 서로 무엇이 먼저인지도 모르게 상호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우리가 논할 수 있는 것은 도덕이 아닌 '윤리'이며, 공통영역 내부에서만 도덕적 문제를 논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윤리' 자체는 전제된 공통영역에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반드시 모든 사람들을 포괄한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윤리는 어느정도 폭력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봤을 때 윤리는 절대성을 띄지 않으며, 개별자들의 공통 영역이 달라지면 윤리도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윤리적 사유는 공통 영역으로 간주되는 명제들을 설정하고, 그 명제로부터 논리적으로 사유들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카뮈의 '죽음'이 도출시킨 여러 귀결들은 이러한 점에서 윤리적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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